나 (Henry Song)의 경력
출 생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30 번지
생 일 : 1914년5월13일
현 주 소 : 캐리포니아주 라성시 토랜스
미국시민권: 1974년10월 취득
학 력:
1933-4: 경성 공립 제2 고보 5학년 졸업.
1934-4: 경성의전 1학년 입학.
1938-3: 경성의전 4학년 졸업.
1938-4: 부터
1940-4: 까지--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미생물학교실 연구원: 논문작성.
1940-4: 부터
1945-8: 까지--경성의전 부속병원 안과, 근무중 해방을 맞이함.
1946-6: 하-바드보건대학원, M.P.H. 학위취득.
1956-6: 하-바드보건대학원, M.S.H. 학위취득.
직 장:
1945-11: 미군정청 보건후생부를 거쳐서 대한민국 보건부를 거쳤고
1956-9: 퇴임 때의 직위는 의정국장 이었음.
1964-6: 부터
1965-9: 까지-- Mulago Hospital, Kampala, Uganda.
1965-10: 부터
1974-5: 까지-- WHO/AFRO/UN, Tanzania, Nigeria.
자영개업:
1957-4: 부터
1965-5: 까지-- 서울종로 1가; 송안과.
1980-6: 부터
1999-11: 까지-- 미국이민후의 일; L. A. Torrance에서 거주, 침구원,
다음은 완전 은퇴.
해방과 도미 유학후의 일생
머리말.
8-15(1945) 해방은 많은 한국사람한테 격동하는 기회를 가져 온 것이다. 나는 때마침 경성의학전문부속병원 안과에서 의원으로서 진료생활을 하고 있을 때이었다. 8월 15일에는 병원 속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즉, 일본천황의 중대방송이 있다는 것이다. 라디오 굛트가 있는 병원 사무실에 직원들이 정오 방송시간에 모여들었다. 이윽고 일본천황의 육성방송이 시작되었다. 게청하자니 일황 육성악센트와 잡음이 섞여서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요약하여보니 일본은 패전하였다는 것과 연합군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을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항전은 즉시 중지하라는 명령이었다. 일본인 직원들은 망연자실하였고 간호원 중에는 흐느끼는 여인도 있었다.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즉, `이제 식민지수탈 과 억압은 끝이 났구나!' 라고 느끼었던 것이다.
이윽고 서울에 진주한 미 점령군은 군정을 실시하게 되었고 군정기구에는 보건후생부가 설치되었으니 종래의 일정 총독치하의 위생경찰제도와는 격단의 차이가 있는 제도가 확립 된 것이다. 따라서 신 기구에 상응하는 부서 설치와 인선도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 신생 보건후생부 책임자로는 미군의 중령 Glen McDonald 가 취임하였고 이의 상대역으로는 이용설씨를 보좌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독립 한국정부가 설립될 것에 대비하여서 유능한 젊은 한국인 의사들을 선발하여 훈련시킨 다음 각부 처에 취임시킬 정책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훈련을 위하여서는 선발된 의사들은 도미 유학케하여 그들이 귀국하면 각 부서에서 책임을 분담케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알게된 나는 만일 선발되어서 유학의 길에 오를 수 있다면 천재일우의 호기회라고 여기고 결연히 자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원에 대하여서는 당시 신생 발족한 서울의대 교수회에서도 만장일치로 추천하였음으로 미군정청에서도 무난하게 선발 채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해방후 최초로 도미 유학하는 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유학에 대한 모든 주선은 미 군정의 알선에 의한 것이다. 즉, Rockefeller 장학생으로 선정된 것이며 미국 유명대학의 보건대학원에 배정 입학하게 한 것 등이다. 나는 Harvard 공중 보건 대학원에서 취학하도록 배정을 받았다. 때는 1945년 11월 중순으로 기억한다.
Harvard 공중 보건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공부와 미국 남부지방에서 실지훈련을 마치고 귀국하니 1946년 11월중순이었다. 그 동안 미 군정은 계속되었고 나는 예방의학국에서 모자(母子)보건을 담당하였다. 이윽고 미군정은 물러나면서 이승만 정권으로 대체하였는데 보건부는 새로 생긴 한국정부 사회부의 일개 국으로 격하되었다. 나는 그 보건국의 분과인 보건과에서 근무를 계속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정부에 근무하는 동안에는 6-25 동란을 겪어야 하였고 부산피난정부의 시기도 겪어야 하였다. 서울 수복후 1955년에는 다시 미국 유학 길에 올랐으니 꼭 10년만에 다시 Harvard 대학 공중보건 대학원에서 공부를 계속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재차 도미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보니 이승만 정권은 4-19 학생 혁명과 박정희의 군사구테타(Coup d'etat)에 의하여 도괴 되었고 따라서 민주정권은 군사정권으로 탈바꿈을 한 것이다. 나는 그러한 정부에서는 일할 생각이 없었음으로 정부에 출사하는 것은 부득이 단념하고 시정에 남아서 안과개업으로 생계를 꾸리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지내던 중 1965년에는 아프리카에 있는 Uganda정부에서 한국의사를 초빙한다는 소식을 알게되었고 그 초빙에 불현듯이 응하였다. 이에 응하여 출국하니 해외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취업한 곳은 신생독립국인 Uganda 의 수도 Kampala 소재의 Mulago 국립병원이었다.
이곳 Mulago 병원 안과에서는 약 1년 반을 봉사하였고 다음에는 UN 기구(機構)인 WHO/AFRO(World Health Organization/African Regional Office)의 의무관(Medical Officer)으로 보직(補職)을 받게 되어서 임지인 Dar es Salaam (Tanzania의 수도)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Tanzania 에 주둔하면서 근무한 기한은 약 8년간 이었다. Project(所任)는 Communicable Eye Disease Control이었으며 그 Project가 일단락 됨에 그에 관한 보고서는 WHO/AFRO에 제출하였다. 이 Project가 끝난 다음의 임지는 Nigeria이었으며 이곳에서는 내 나이 만 60세를 맞이하게 되었고 UN기구의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다. 1974년 5월이었다.
퇴임한 다음에는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L. A.에 영주 정착하게 되었다. 그 동안 미국시민권도 획득하였고 은퇴생활을 위한 생업으로는 침구업(鍼灸業)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 침구업에 필요한 침구면허 L.Ac(Licensed Acupuncturist)는 1978년에 가주 정부가 발행한 최초의 면허이었고 미국 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초대 의료 대행업 (Alternative Medical Practitioner)이기도 하다. 올해(西紀2000년)를 맞이하니 새천년(Millennium)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감회를 새롭게 하고 새출발을 기도하기도 한다. 나 역시 여러 가지로 생각을 새롭게 하는데 지난날들이 기억에서 자주 떠오르기도 한다. 특히, 일제 침략 하에서 지내다가 해방된 감격과 그 당시 뜻밖에도 초대 미국유학을 하게 되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더 늦기 전에 그 당시의 감격하던 일들을 적어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된다. 후생(後生)들이 읽어보고 그 들 인생생활의 참고로 하기를 바란다.
이 원고의 교정과 문맥의 정리를 위하여 수고하고 협력한 친지들한테 심심한 감사를 표시한다.
차 례
머리말.
1해 방
2. 창씨개명(創氏改名)의 철폐
3. 일본패망의 경위와 나의 신상변경
3-1. 서울상공에 B-29기 출현
3-2. 신생 서울의대와 'Coal Bin'
3-3. 도미유학의 결정과 그 경위
4. 도미유학 출발준비와 10명의 명단
4-1. Dr. Choi의 역할
4-2. Passport의 작성
4-3. 1:15의 환전(換錢)
4-4. 도미 출발 전에 이승만 박사를 심방 하다.
5. 서울출발과 처음으로 미국 가던 이야기(Episode)
5-1. 김포공항에서 미공군 수송기에 탑승
5-2. 'Follow Me' Jeep차의 래도
5-3. Airsick하면서 아쓰기(厚木) 일 군용비행장에 도착
5-4. 책보 2개의 분실
5-5. 동경을 떠나 태평양을 횡단
6. Hawaii에 도착하고 그곳의 교포와도 만나다.
7. San Francisco 근처의 미 군용기지에 도착.
8. 미 대륙횡단
9. 기차여행으로 Washington, D.C. 로 가다.
9-1. Korean Commission의 임병직(林炳稷)씨와 면회
9-2. Francesca 여사 방문
9-3. Washington, D.C. 시내에서 shopping하고 옷 갈아입기
10. Boston으로 기차여행하고 Harvard School of Public Health에 등록하다.
10-1. 대학원 등록과 숙사 배정
10-2. Concise 영어사전 발견과 입수
10-3. 강의실에 첫 출석
10-4. 수강한 과목과 인상에 남는 내용들
10-4-1. 수혈과 Rh Factor
10-4-2. Social Security Act
10-4-3. 모유우선주의와 미숙아를 위한 Incubator
10-4-4. Malaria Control 과 Mosquitoes의 생물학적 지견 응용
10-4-5. Yellow Fever의 극복과 Panama Canal의 개통
10-4-6. Community 란 용어와 그 뜻
10-5. Mrs. Barnabi
10-6. Boston의 교포와 그들의 동정
10-7. 대학원졸업과 MPH 학위수여 받음
11. Rockefeller 본부로 장학사를 방문 함
12. Helman Keeper Hospital 참관
13. Niagara 폭포 관광
14. 서재필(徐載弼) 박사를 심방 하다.
15. Jefferson Medical School로 Dr. Cha를 방문하다.
16. 남부 3주에서 의 Field Trip
16-1. Kentucky주에서 Field Trip
16-1-1. Mounted Midwifery Service
16-1-2. Pit Privy
16-1-3. One Room School
16-2. Tennessee주에서 Field Trip
16-3. Alabama주에서 Field Trip
16-4. 남부에서 실습한 의이(意義)
17. 다시 Washington, D. C. 로 집합한 일행 10명
17-1. Washington, D. C. 출발 Chicago 경유 Seattle 착
17-2. Seattle의 인상
17-3. 배타고 태평양횡단
17-4. 인청항에 입항
18. 미군정청 보건후생부에 출근하다.
18-1. 난항하는 보건행정
18-2. 보건소법 입안
18-3. 국민의료법의 입법이 부산피난국회를 통과 하다.
19. 재차 도미유학
19-1. 대학등록과 선택한 과목
19-2. M.S.H.(Master of Science in Hygiene) 학위수여식에 참석
19-3. 서두수(徐斗秀) 교수와의 면접과 조언을 받다.
20. Monterey에서 대기하다가 귀국하다.
20-1. California주 와 Nevada주를 일주하는 승용차 여행
20-2. San Francisco에서 배에 오르다.
21. 서울에서 낭인생활 하다가 안과임상에 복귀하다.
21-1. 송안과 개업과 진료생활
21-2. 주희(柱熙)의 미국유학 지망
22. Uganda/East Africa, Mulago Hospital에 취직과 출국
22-1. Mulago Hospital의 안과의로 봉사
22-2. Uganda의 물정
23. WHO/AFRO의 P. H. Advisor로서 Tanzania로 부임
23-1. Communicable Eye Diseases Survey
23-2. Morogoro에 주둔
23-3. Dodoma에 주둔하면서 본격적인 Campaign
23-4. 급성요통,Sciatica, 발병
24. Nigeria로 전근
24-1. Lagos로 부임
24-2. Irolin에 정착
24-3. Malaria 리병과 투병
24-4. Ibadan의 한상기(韓相棋)박사
24-5. 아이들,3남,의 면학동정과 성취
25. L.A.에서 은퇴하고 영주한다.
25-1. Real Estate agent 면허 취득과 Community Life에 동화
25-2. California L.Acs(鍼灸免許) 획득
25-2-1. 가주침구사 면허법 상정과 Lobby활동
25-2-2. Grand Father Clause 조문 삽입과 면허 받음
25-2-3. South Bay Acupuncturist Association결성 과 Seminar 운영
25-2-4. Acupuncture College의 증설 과 L.Acs의 증가
26. 상처와 재취
27. 여가에 여행하고 관광을 즐기다.
27-1. 재직시대
27-1-1. 1952, Saigon/Vietnam
27-1-2. 1966-1974, Kampala/Uganda, Dar es Salaam/Tanzania, Brazaville/Congo, Geneva/Swiss, Khartoum/ Sudan, 년가여행.
27-2. 미국에 이민하고 정착한 시대.
27-2-1. 미국내 여행
27-2-2. 미국외 여행
27-2-3. Hong Kong 출입
글을 마치며
회 고 록
1. 해 방
세계 제2차 대전 즉 태평양전쟁의 종말은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라디오를 통한 육성방송으로 연합군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하였다고 국민에게 발표함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일본군대는 일제히 그 점령지대에서 철퇴하였고 한국에서도 철수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은 자동적으로 해방을 맞이하였고 35년간에 걸친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2. 창씨개명의 폐지
해방과 동시에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표방하면서 일본어를 국어로 상용하라고 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하라고 하던 불합리성은 일시에 사라진 것이다.
3. 일본패망의 경위와 나의 신상변화.
해방으로 이른 경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태평양전쟁 전 일본에서 돌발한 군부반란 2-26사건은 만주에 만주제국이란 괴뢰정권을 수립하였고 일본정부기구도 국수주의(國粹主義)에 심취한 청년장교들의 Coup d'etat 등이 연발하는 등 급작스럽게 군국주의로 돌변한 것이다. 이러한 중국대륙침략은 더욱 확대를 거듭하더니 장개석(蔣介石)정권은 부득이 중경(重慶) 으로 후퇴하였고 전세는 장기전으로 돌입하니 양자강 이남에서는 영-미(英-美)의 식민지정책과도 정면충돌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급기야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 (大東亞共榮圈)을 선언하였고 독일과 이태리와는 추축국(樞軸國)임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긴박한 정세가 전개되더니 일본해군은 Hawaii 의 미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하였으며 미국은 부득이 태평양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의 육해공군은 개전초판에는 승승장구하는 듯 하더니 반격에 나선 미 육해공군은 Midway 해전에서 일본해군의 주력을 대파하면서 남태평양의 Guadalcanal 섬에서도 일본점령부대를 축출하니 일본의 남진공략의 정책은 좌절하였고 패전의 기운이 역력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일-미양국의 전황은 일본에 불리하게 되어가던 중 미군의 원자탄(原子彈)투하는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기'(長崎) 두곳을 삽시간에 초토화(焦土化) 한 것이다. 무수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고 재기불능상태에 빠지게 된 일본은 더 이상의 항전(抗戰)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참상에 망연자실(亡然自失)한 일본천황은 드디어 무조건 항복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침략에 신음하던 모든 나라들은 일시에 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3-1. 서울상공에 B-29기 출현
때는 1945년 1월경 이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의전병원 3층에 있는 안과 외래 진찰실에서 환자 치료를 하고 있을 때이었다. 별안간 고사포를 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곧 3층 옥상에 올라가 보았다. 멀리 남산 상공에는 뭉개뭉개 피어오른 솜뭉치 같은 포연이 아침 구름 한점 없는 창공에 떠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사방은 고요하기만 한데 이상히 여기면서 머리를 들어서 상공을 쳐다보니 뜻밖에도 낮선 큰 은색 비행기 한 대가 북서쪽으로 유유히 나르고 있으며 그 비행기의 꽁무니에서는 폭포수와도 같은 백색 무늬가 용솟음치면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도 선명하게 볼 수가 있었다. 처음 보는 장관이었고 워낙 고공을 나르고 있는지라 남산방면에서 쏘아 올린 고사포탄은 도저히 맞히지도 못하는 것임을 알게 하였다. 물론 이 폭격기를 격퇴하겠다는 일본 군용기는 한대도 날아오지 않았다. 당시 일본본토 각도시 상공에 날아온 미 공군 B-29기 중 한대가 한국을 정찰하고자 진입하여 온 것이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 B-29기 가 그 백색'Air Stream'을 흘리면서 서울상공을 유유히 지나서 인왕산을 넘어 서북쪽으로 사라지던 광경은 기억에 생생하다. 이 B-29기는 일본군으로부터 탈환한 남태평양의 '사이판' 과 '괌' 등 섬의 기지를 중심으로 수백 대의 폭격편대를 편성하여 주야를 불문하고 일본본토를 파상공격 하였음은 물론 '히로시마'시 와 '나가사기'시 에도 원자탄을 투하한 무적을 과시한 미군의 공격무기 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패망을 유도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비행무기 이었다. 과학문명이 월등하고 물자가 풍부한 미군은 그 불사퇴의 적개심 'Kill the Japs, Remember the Pearl Harbour'란 구호를 외치며 일사불란하게 일본군을 압박하였으니 천황폐하 만세만을 절규하면서 대항하던 일본군의 사기만으로는 마치 힘센 어른과 연약한 아이와의 싸움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고 하겠다.
3-2. 신생 서울의대 와 'Coal Bin'
해방과 혼란기를 맞이한 경성의전은 일본인 직원 모두가 철수하면서 한국인 동창생들이 회동하였고 단과대학으로 '서울의과대학'을 발전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학장에는 고참선배 심호섭(沈浩燮)씨를 추천하였고 병원장에는 백인제(白麟濟)씨를 추대하였다.
중앙청에는 미 군정이 시무 하게 되었고 보건분야에는 Col. Lingenfelt가 취임하게 되었는데 Col.은 시내의 각 의과대학을 접수차 출동하였고 따라서 신생한 서울의과대학 부속병원에도 내도 하였다. 이때 나는 마침 3층에 있는 안과외래에서 환자를 보고 있다가 내방한 Col.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부득이 서투른 영어로 각실을 안내하게 되었고 "This is the out patient clinic"이며 "This is the operating room"이란 식으로 설명하였다. 그랬더니 잠시후 아래층에서 개최 중이던 교수회의에 참석하였던 Col.은 급사를 올려보내서 전갈하기를 나더러 그 회의에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어리둥절 하였다. 내가 무엇 잘못한 일도 없는데 왜 호출을 당하나? 하면서 회의실이 있는 본관 아래층에 내려가 보니 Col.은 반가워하면서 나를 동석케 하였고 통역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부적이라고 사양하니 참석한 교수들도 사양치 말고 수락하라기에 부득이 응낙하였다. 이윽고 Col.은 병원구내를 일순 하여 본 감상을 이야기하는데 'Coal Bin' 상황을 질문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Coal Bin'이란 용어를 모르는 까닭에 당혹하게되니 눈치챈 Col.은 'look up your dictionary! 하는 것이었다. 곧 Concise영어사전을 찾아보니 석탄광이란 뜻임을 알게 되었으며 즉 병원의 석탄광에는 얼마만큼의 석탄이 적재되는 것이냐? 고 문의 함을 알게 되었다. 그와 같이 통역을 하니 교수들도 알아차리게 된 것이고 나도 그때에 받은 인상과 영어단어 'Bin'은 일생을 통하여 잊어지지를 아니 한다. 얼마 후엔 미 군정청에서 파견하는 초대 미국유학생을 모집하는데 내가 응모하니 교수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천거하였으며 즉 그 당시 서투르나마 영어통역에 참여한 덕분인가 싶다.
3-3. 도미유학의 결정과 그 경위
새로 설립한 서울의대의 병원장 백인제박사는 자주 미 군정청에 출입하면서 학교와 병원을 운영하기 위한 타협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 군정청 보건후생부에서 돌아오더니 새로운 정보라고 하면서 요지음 미 군의관들이 한국인 청장년의사를 선발하여 미국유학을 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인즉 모집인원은 10명정도이며 '세브란스'의전 졸업생을 중심으로 선발중이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인선에는 각 의과대학에서 공평하게 선출하자고 제의하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한즉 우리 서울의대에서도 응모케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교수회에서는 나를 제일 우선 으로 천거하게 되었고 그 까닭은 내가 장차 보건행정관으로 출발할 의사표시를 한 것 과 이미 영어통역등으로 영어가 통한다는 인식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미 군정청 보건후생부에 출두하여 미 군정관과 'Interview'를 하였고 나는 도미 유학하는 10명중의 한사람으로 선출결정을 보게 된 것이다.
4. 도미유학 출발준비와 일행 10명의 명단
명단은 다음과 같으며 이 10명은 실로 해방후 최초로 미국에 여행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3대 명문대학으로 각각 진학하였다. 세 Group 으로 분류한다.
A-Group: Harvard 보건대학원
황 용 운(黃 龍 雲) - U.S. Pittsburgh의대 졸업
송 형 래(宋 亨 來) - 경성의전 졸업
최 명 룡(崔 命 龍) - 세브란스의전 졸업
B-Group: Johns Hopkins 보건대학원
최 제 창(崔 濟 昌) - Virginia의대 졸업
윤 유 선(尹 裕 善) - 세브란스의전 졸업
백 행 인(白 行 寅) - 세브란스의전 졸업
C-Group: Michigan 보건대학원
최 창 순(崔 昌 淳) - 세브란스의전 졸업
주 인 호(朱 仁 鎬) - 경성의전 졸업
한 범 석(韓 凡 錫) - 성대 의학부 졸업
김 동 길(金 東 吉) - 상해 Saint Johns의대 졸업
이상 10명을 인솔한 Dr. Choi(崔 濟 昌)는 일행 10명의 단장 역할을 하면서 많은 수고를 하였고 그분의 노력과 성과는 다음과 같이 적어 본다.
4-1. Dr. Choi의 역할
개성에 있는 남성병원 내과에 근무하다가 일본패망에 의하여 해방을 맞이한 Dr. Choi 는 38선을 경계로 그 이북에 재빨리 진주하여온 쏘련군 병졸들의 행패를 목격하였다. 개성시민 유력자 층에는 이러한 불안상태를 좌시만할수 없으니 상경하여 미 군정청에 호소하여야 한다면서 Dr. Choi에게 동참을 촉구했다. 군정청을 방문한 Dr. Choi는 유창한 영어로 관계관에게 쏘련군의 개성진주와 동시에 야기된 민폐상항을 호소하였다. 당시 미 군정청 보건후생부에서는 영어가 통하는 한국인의사를 찾고 있던 차이므로 Dr. Choi의 방문을 받은 미 군정 보건후생부 책임자이던 Dr. Glen McDonald와는 매우 반가운 만남을 갖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동기로 Dr.Choi는 Dr.McDonald의 권고에 의하여 군정청 보건후생부에서 미 군정의 보좌역활을 맡게 된 것이다. 때마침 미 군정청에서는 한국인의사를 선출하여 도미유학을 시키고자 계획중이었음으로 동료 보좌관이던 이용설박사와도 긴밀히 상의하면서 10명의 도미유학생을 선출함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4-2. Passport 의 작성
유학차 미국으로 급히 떠나가야 할 터인데 필요한 여권이 없음으로 그 작성을 미 군정관은 Dr. Choi로 하여금 고안케 한 것이다. 이러한 급작스러운 Passport 작성은 손바닥만한 용지에다가 Typewriter로 기입하기를 주소, 성명, 생년월일 그리고 각자의 사진 한 장씩을 붙인 것이었다. 이러한 급작 Passport를 각자는 소지하고 출국준비를 하였다. 이와 같이하여 일행 10명은 김포공항에서 미군용 수송기 편으로 출발하여 일본 아쓰기(厚木) 비행장에 도착하였고 여기서 일행은 다시 미 군용 Truck에 옮겨 타고서 요꼬하마(橫濱)가도를 거쳐서 일본궁성 앞에 자리잡은 GHQ-Hq(일본점령 미군사총사령부)에 도착하였다. 우리일행의 도착 보고를 받은 GHQ-Hq의 관계장교들은 우리가 소지한 급작 Passport로는 미국 입국은 불가능하다면서 재발급을 받으라고 하였다. 부득이 근처 미군 장교 숙사에서 유숙하면서 Passport의 재발급을 기다렸다. 미 국무부와 접촉하면서 재 발행한 Passport입수까지는 수삼일 이 걸렸고 이 Passport를 입수한 우리일행은 일본을 출발하여 드디어 미국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Passport는 유학하고 귀국한 다음에도 소중히 보관했었는데 6:25 동란을 겪는 동안에 가산집기 일체를 도난분실 당하는 통에 분실하고 말았다. 해방후 처음으로 발행되어 미국여행에 사용했던 Passport인 만큼 역사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기증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면 애석하게 여겨진다.
4-3. 1 : 15 의 환전(換錢)
해방직후이고 미군이 진주한 것도 월여밖에 안됐던 때인지라 시중에 유통되는 돈은 일화(日貨)뿐 이었다. 도미준비로 미화가 필요한데 아직도 일화를 미화로 바꾸는 방법은 없을 때이었다. Dr. Choi는 미 군정청 재무관과 만나서 의논하니 환율(換率)에 대한 상의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1 : 15 즉 일본돈 15엔을 미화 1$ 과 교환함이 좋겠다고 하니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이런 제안이 성립되니 이 환율은 실로 해방후 최초로 성립된 환율이기도 하였다고 기억한다. 나는 이런 환율에 의하여 미화 $1,000을 환전하였고 도미 출발하는데 유일한 소지품으로 그리고 재산으로 위 안주머니에 잘 보관하고서 떠났으며 귀국할 때에는 긴요한 생활 필수품을 사는데 사용하였던 기억이다.
4-4. 도미출발전에 이승만 박사를 심방 하다.
그 당시 이승만 박사는 미군정책임자 Hodge중장의 호의로 초빙되어 귀국하였고 약 일 개월 전부터 돈암동 소재의 돈암장에서 기거하고 있을 때이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한 독립투사이었고 민족정신 함양의 선구자로서 일반 한국인 한테서는 국부적(國父的)존재로 추앙을 받고 있을 때인지라 우리일행은 초대 미국유학생 신분으로 돈암장으로 이 박사를 심방하기로 하였다. 비서 윤치영씨를 통해서 우리 일행 10명은 Dr.Choi를 선두로 이 박사를 면담하였다.
미국유학의 취지를 알게된 이 박사는 매우 반색하면서 '공부들 잘 하고 돌아오면 우리 모두 같이 나라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자' 라고 하면서 우리 일행의 장도를 격려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를 회고하여 보면 우리 일행은 그 후 일년 뒤에는 귀국하여 각각 미 군정청 보건후생부에서 일하게되었고 이 박사는 당시 신탁통치등 국내외의 정치소동 소용도리속에서 시달리면서 끝내는 남한 만에서 즉 38선 이남에서 만의 민주적 총선거를 치르게 되었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미군정은 신생 대한민국으로 이관 된 것이고 우리 초대 도미 유학한 10명은 자동적으로 그 소임을 각각 새로 수립된 한국정부 사회부산하의 보건국으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Dr.Choi 만은 사회부 보건국직원으로서의 보직을 받지 아니 하였으며 정부직에서는 자연 퇴직을 한 셈이다.
그후 Dr. Choi는 정부직과는 관련 없이 도미하여 임상수련을 한 다음 미국에서 영구 거주자가 된 것이다.
5. 서울출발과 처음으로 미국에 가던 이야기(Episode).
때는 1945년 10월 초 이른 아침이었다. 우리일행 10명은 군정청(中央廳)앞 광장에 집합하였다. 시내 각 신문사 사진반의 사진 Flash 를 받으면서 미 군용 수송 Truck에 올라탔다. 일행의 행장은 간소하였으며 조그마한 손가방, 작은 보따리 등을 지참하였을 뿐이고 옷차림은 대체로 초라하였다. 나도 간출한 행장으로 떠난다는 생각으로 아래위 검은 사아지 양복차림에다가 소지품으로는 책보 두개 뿐이었다. 그 책보한개는 Concise영어사전 하나와 필기용 note book,만년필 그리고 연필 등이었고 또 한 개의 책보 속에는 과일 몇 개를 간식하라고 안사람이 준비하여 준 것 뿐 이었다. 이러한 책보 두개 뿐이고 손가방 하나도 없는 나의 여장을 본 Dr. Choi는 말하기를 미국에 가면은 책보 싸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고 하면서 주의하였다. 아차! 하고 송구스럽게 여기든 심정은 지금도 그때 생각으로 생생하게 떠오른다.
5-1. 김포공항에서 미 공군 수송기에 탑승
그 당시 김포공항은 일제가 군용 비행장으로 서둘러서 만들고 있던 곳으로 근로봉사 만으로 공사를 하던 곳이다.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도 미완성 상태이었다. 그런데 우리일행이 미군 수송 Truck을 타고서 이곳에 도착하니 놀랍게도 비행장 속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많은 각종 미 군용기가 계류되어 있었다. 마음속으로 적지 않게 놀라면서 어느 비행기에 탑승할 것인가? 하고 Truck 좌석에서 대기하였다.
5-2. 'Follow Me' Jeep 차의 내도.
어리둥절하면서 좌석에서 내다보고 있으니 한 대의 Jeep차가 나타났다. 보아하니 그 차의 번호 판에는 "Follow Me"란 식표가 붙어있고 알고 보니 우리일행을 안내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C-54라고 하는 미군용수송기, 낙하산부대 수송용 군용기, 옆에 도착하였다. 우리일행은 Truck에서 내려서 그 군용기에 탑승했다. 기내는 Canvas좌석이 좌우로 비치되어 있어서 우리는 그 Canvas좌석에 각각 자리를 잡았다.
5-3. Airsick 하면서 아쓰기(厚木) 일본군 비행장에 도착.
우리일행은 모두들 생후 처음 타보는 군용비행기, 이때는 민간비행기는 물론 없을 때이고 Jet비행기란 말도 없을 때임, 이었으며 이륙한 비행기는 한반도를 횡단하더니 동해 바다 위를 나르고 있었는데 기류관계인지 비행기는 몹시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일행 중에는 메스꺼워서 토하는 사람도 생기게 됐다. 동해를 날은 비행기는 일본 본토위로 진입하였고 백설이 덮인 부사산 옆을 나르고 있으니 소문으로만 듣던 일본 부사산(富士山)구경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이윽고 군용기는 아쓰기 비행장 상공에 진입하였고 그 상공을 2-3회 저공 선회하다가 착륙하였다. 보아하니 일본군의 군용기 격납고는 미군 폭격에 의한 듯 백공천창이 났고 비행장 한구석에서는 일본군용기 잔해를 모아 놓고 방화하여 소각시키는데 그 화염이 상공에 치솟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일본의 패전을 실감케하는 첫 장면이기도 하였다. 착륙한 비행기가 문을 여는데 나는 그 문을 나서면서 참았던 토기를 발산시키기도 하였다.
5-4. 책보 두 개의 분실.
C-54기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대기하고 있던 미 군용Truck에 올라타고서 일본 동경으로 달리게 되었는데 요꼬하마(橫濱)시를 경유하였다. 연도에는 패전의 흔적이 역역한 파괴된 모습이 산견되었고 도로는 몹시 상한 상태로 진흙먼지가 굉장히 일고있는 상태이었다. 동경에 진입하니 거의 모든 가옥과 건물들은 소멸되었고 오직 일황의 궁성과 그 앞줄의 몇몇 건물만이 잔존하고 있었다. Truck에서 내리려고 하니 좌석 옆에 놓아두었던 책보 두개는 온데간데 없었다. Truck좌석 뒷난간사이로 밀려 떨어져 나간 것이 틀림 없었다. 문득 생각하니 책보 속에 보관하였던 Concise영어사전이 분실된 것을 알게되었고 망연자실 (亡然自失) 하였다. 하차하여 일본궁성 앞의 GHQ Hq입구에 선 나는 손에 아무것도 없는 단신이 된 것이다.
5-5. 동경을 떠나 태평양을 횡단.
앞에서도 적은 바와 같이 Passport의 재발급을 위하여 동경 GHQ Hq근처 미군 장교숙사에서 수삼일간 지체하다가 Passport가 재 발급되니 미국 행의 여행은 계속하게 되었고 그 시발점으로 아쓰기비행장을 이용하게 되었다. 탑승한 비행기는 미군 장교용 수송기로서 기내에는 개별좌석이 되어있어 매우 기분 좋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쌍발비행기는 아쓰기를 이륙하더니 매우 순조로운 비행을 계속하였고 Guam섬을 경유하더니 다음 Hawaii까지의 중간 기착지로는 Wake섬 과 Johnston섬을 경유하면서 급유를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Wake섬에 도착하니 미군숙사 속에는 PX시설이 있어서 우리 일행도 마음대로 일용품을 살수가 있어서 몇몇 가지 상품구입도 하였다. 매우 우쭐하는 기분이었고 신기하다는 생각도 하였다.
6. Hawaii에 도착하고 그 곳의 교포와도 만나다.
Johnston을 떠난 군용기는 시종 편안하게 비행하더니 Hawaii에는 정오가 좀 지나서 도착하였다. 보아하니 그 비행장의 광대함이며 엄청난 시설 그리고 그 즐비한 각종 군용 비행기등 이것은 모두 일행을 놀라게 하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그 비행장 속에는 Scooter Motor Cycle에 올라탄 병사들이 분주히 내왕하고 있는 장면도 볼 수 있었고 참으로 대단한 곳에 왔구나 하는 생각과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Hawaii는 미국 입국하는데 관문인지라 우리 일행은 이민국 과 세관을 거쳐야 함으로 각자는 Passport제시와 수하물 검사를 받아야 했다. 나는 Passport를 제시한 다음에 세관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알몸뚱이로 통과 하고저하니 세관원은 수하물의 제시를 요구한다. 수하물은 없다고 하니 매우 의아하게 여기는 눈치이기도 하였다. 앞서도 기록한바와 같이 일본 요꼬하마 가도에서 책보를 분실한 까닭에 홀홀 단신이 된 것이다. 다음에는 우리일행은 미군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고 식사 후는 마침 찾아온 Hawaii 거주의 교포 10여명과도 만나서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들 한국교포는 우리일행의 Hawaii도착한 것을 어찌 알고서 찾아왔는지 몰랐으나 뜻밖의 만남이고 교포임을 알게되니 반가웠다. 모두들 화려한 몸차림이 초면에 인상적이었으며 열대지방인 이곳 훈풍에 나부끼는 남자들의 Tie와 여자들의 Blouse는 매우 인상적이었고 반면에 우리일행의 초라한 차림새와는 매우 대조가 되어 내심 창피스럽던 기억이다. 여러 가지로 담화를 교환하게 되었는데 해방후의 한국사정이 궁금하던 그들 중 한사람은 뜻밖의 질문도 한다. '이승만 이가 귀국하였는데 서울에서 무엇을 하고 있어' 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놀랐다. 여기 Hawaii 교포들 중에는 이승만 반대파에 속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교포들과의 면담과는 별도로 많은 다른 한국사람들과도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이 분들은 비행장 속의 미 군용식당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포로복장 이었고 한국말로 자기들의 입장설명을 한다. 즉, 남태평양 전쟁터이던 Tarawa섬에서 일본군이 패전하자 미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일본 군인들과는 분리되어 Hawaii로 이송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 분들을 위한 통역에는 전쟁전 한국에서 선교사업에 종사하던 한국말을 구사하는 여자 선교사 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 선교사 여인은 우리한테 귀속말을 하면서 이들 한국포로들은 이곳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있으며 쉬운 식당일을 하고 있는데 곧 한국으로 송환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네들은 일본 포로도 아닌데 억류되어 있다고 불평한다는 것이다. 염치없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Hawaii 군용비행장에서 이와 같이 오후시간을 지내면서 있자니까 Dr. Choi는 우리 일행의 일정이 변경되었다고 전한다. 즉, 이곳 Hawaii에서 일박할 예정이었는데 비행기가 저녁때 출발하니 계속하여 여행을 한다는 것이다. 여행에 피로한 우리일행은 할 수 없이 다시 비행기에 탑승하였고 어두운 태평양을 횡단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행중 최명룡씨는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면서 미군 Dispensary로 가더니 맹장염의 진단 하에 수술을 받게 되어 처지게 되었다. 따라서 Harvard대학원에 등교하는 것도 약 2주일 정도는 늦었던 기억이다.
7. San Francisco 교외 미 군용기지에 안착.
Hawaii공항을 떠난 군용기는 땅거미가 깔린 바다 위를 줄곧 나르더니 드디어는 미국대륙에 진입하였고 착륙한 곳은 그 지명의 기억은 안 나는데 San Francisco 에서 동북쪽으로 위치한 군용 비행장이었다. 이곳에서 군용 truck에 옮겨 타고는 Highway를 통과하면서 약 50mile 정도 떨어진 곳 즉 San Francisco의 대안 Oakland 소재의 군용숙사로 이동하였다. Highway를 지나고 있자니 무수한 자동차들이 휘황한 Headlight를 켜고서 내왕하는 것이었다. 내 생전 처음 보는 장관이었고, 아하! 하고 감탄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하는 동안에 태평양횡단은 끝 마치고 미국에서 첫날밤은 미 군용숙사에서 지나게 된 것이다.
8. 미 대륙 횡단.
Oakland의 미군숙사에서 일박하고 나니 미군 측은 계속비행을 재촉하였고 우리 일행중에는 장거리 비행에 못 견디겠다고 기차여행을 주장하는 사람도 생겼다. 그러나 계속 비행은 군의 행정명령이라고 하니 부득이 다시 군용기에 올라타고서 계속여행을 하니 Chicago로 향하는 것이었다. Chicago로 향하는데는 중간 기착지로 Denver, Colorado와 Des Moines, Iowa에도 들렸고 Denver에서는 공군 Hangar속의 군용식당에서 점심 식사도 하였다. 그런데 이 군용 Hangar는 목조건물로서 그 높이가 지상건물로치면 10층도 될듯 했고 그 Hangar속의 통로를 걸으면서 그 천장을 쳐다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로 거대하게 보였다. 미군 군용시설의 거창함에 그저 압도당한 감각이 지금도 새롭기만 하다. 계속 비행하면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비행기는 소위 5 대호를 경유하면서 Chicago를 통과하였고 계속하여 나르더니 끝내는 New York의 La Guardia공항에 안착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비행기여행은 태평양횡단과 미국대륙의 횡단을 무사히 끝낸 것이다. 요즘 세상에는 Jet기 비행시대라고 하여 오늘 서울을 떠나면 내일에는 New York에 도착한다는 초고속 여행시대가 된 것을 생각한다며는 실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금할 수가 없다.
9. 기차여행으로 Washington, D.C. 로 가다.
미 군용기에 의한 여행이 끝난 우리일행은 New York에서는 기차 여행을 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수도 Washington으로 달리는 기차연도는 전부 공업도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되었다. Washington에 도착하니 숙소는 미 국방부가 미리 알선한 Hotel이었고 그 곳 으로 가면서 내다보니 Washington시는 공원 속에 자리 잡은 곳이로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다음날에는 Surgeon General's Office, 이 Office는 당시 전시건물로서 백악관 뒤편 녹지대에 위치하고 있었음, 로 가서 우리일행의 도착인사를 Surgeon General Peron과 만나서 교환했다.
Briefing을 받게 되었고;
1). 우리일행 10명의 취학할 3개 대학과 그 각대학에 배정된 명단,
2). 우리일행 10명은 Rockefeller 장학생으로 채택되었다는 것,
3). 각자가 필요로 하는 기차여행표, 등의 조처를 받았다.
9-1. Korean Commission의 임병직(林炳稷)씨 와의 면회
Surgeon General Peron과의 Briefing이 끝난 우리일행은 각자가 배정 받은 대학으로 떠나기 전에 수일간을 Washington에서 지나게 되었는데 제일 먼저 우리를 찾아온 사람은 임병직씨 이었다. 임씨는 별명으로는 Col. Lim이라고도 호칭되었는데 이승만 박사가 운영하는 Korean Commission의 대변인으로서 이박사가 서울로 떠난 다음에는 Commission일을 전담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박사부인 Francesca 여사는 공관 격인 사저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이었다. 우리일행이 Washington에 도착한 사실을 알게된 임병직씨는 곧 우리를 찾아왔고 계속하여 우리일행을 위하여 많은 편리를 제공하였다. 즉, 한국교포에 대한 현항 설명, 이박사의 법률고문과의 면접, 이박사부인과의 만남, 그리고 우리일행을 위한 환영연을 Astoria Hotel에서 개최하였고, 시내관광을 위한 편리제공등 많은 수고를 해 주었다. 이와 같이 지나며 사흘째 날이 되니 뜻밖에도 다른 한국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소개를 받으니 이분은 Korean Affairs란 기관을 대변하는 분이었다. 담화를 교환 하여보니 Korean Commission과는 아주 상반하는 한국교포들의 대변기관임을 알게 되었다. 이 Korean Affairs의 주도인물로는 가주에 있는 Reedley소재의 교포농장 Kim Brothers Farm의 김호(金浩)씨와 동업자인 김형순씨의 두사람 이고 Washington의 대변인은 그 동업자인 김형순씨의 사위로서 2세교포 임을 알게 되었다. 이 Korean Affairs 대변인의 신랄한 Korean Commission에 대한 비판을 듣게 되니 나는 내심 놀랐고 앞서 말한바와 같이 Hawaii를 통과할 때도 이승만 박사를 반대하는 교포들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교포들 속에는 이 박사 반대파가 꽤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Korean Affairs의 대변인은 말하기를 이 박사는 독립운동을 운위하면서 '자의언동을 일 삼으니 미 국무성에서는 상대도 하여주지 않는다' 라고 하면서 무식한 교포만을 상대로 금품을 강요하고 군림한다는 것이다. Korean Commission의 Col. Lim이란 임병직씨의 칭호도 이박사가 붙여준 별칭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내일 Schedule로 우리일행이 Col. Lim과 동행하게 되어 있으면 자기네는 사양한다고도 했다. 이와 같이 두 개의 교포기관이 상반하는 주의주장과 견해로 반목하고 분열되어 있으니 한국의 앞날이 걱정스럽기만 했다.
9-2. Francesca여사 방문.
임병직씨, 이승만 정권의 초대 외무장관, 의 안내로 Korean Commission의 건물, 백악관뒤편에 위치하였고 공관이라고도 호칭, 을 방문했다. 우리일행 10명을 접견한 여사는 매우 흥분상태가 되었고 실내를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좌불안석 하였다. 자기도 2-3주일 후에는 서울에 가서 이 박사와 만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인상을 보아하니 후덕한 곳은 하나도 보이지 않으며 경거망동하는 품이 꼭 동물원 속에 갇힌 여우가 그 울안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구경꾼을 쳐다보는 것과도 같은 인상이었다. 무슨 여자가 저렇게 방 속을 왔다 갔다 하면서 침착한데가 없나 싶어서 매우 이상하게 여겼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이박사가 대통령으로 집권할 때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소문이 Francesca여사로 인해 많이 나왔는데 특히 정부의 장차관 인사에도 가끔 관여했던 것이 사실이며 항간에 나돌던 비판이 '이박사의 외교는 귀신이고, 인사(人事)는 망신이다' 라고 한 것도 Francesca 여사의 국정 간섭을 풍자 한 것이라고 본다. Korean Commission의 건물도 공관이라고 호칭하고 있었는데 그 건물의 소유등기는 Francesca여사의 명의라고 한다. 교포들의 출자로 구입한 건물을 사유화하였다고 이 박사를 지탄하는 목소리도 교포들 사이에는 돌고 있었다.
9-3. Washington시내에서 Shopping하고 옷 갈아입기
앞서 말한바와 같이 단체행동을 하던 우리 일행은 각자가 자유시간을 갖기로 하고 시내로 shopping차 나가게 되었다. 나는 백화점을 찾아갔는데 그 입구는 Revolving Door장치임을 모르고 들어가다가 그 문의 유리창과 충돌하니 그만 안경테가 부러졌다. 시력이 떨어지며 당황도 하게 되니 곧 안경점으로 가야 했고 안경테를 교환하는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다. 내심 그 물가고에 놀랐다. 다시 백화점으로 가서 우선 입고 온 양복이 초라한지라 색깔을 골라서 상하의 한 벌을 사고 구두도 한 켤레 사서 구색을 갖췄다. 입고 온 양복과 구두 등을 넣어야할 손가방도 필요하니 가죽가방, Boston Bag, 한 개를 샀는데 그 값이 $45이니 큰 돈 이고. 양복,구두 그리고 안경테 등에도 적지 않은 비용을 쓰고 나니 한국에서 환전해 가지고 온 돈 사정 이 걱정스러워 졌다. 그러나 알몸으로 도미 하여온 나는 몸차림을 새롭게 하였으니 촌놈 신세를 모면 한 것 같고 내심으로는 안도감도 났다. 곧 Boston으로 떠나가야 하는데 우선 몸차림에 대한 걱정은 덜 하게 된 셈이다.
10. Boston으로 기차여행 하고 Harvard School of Public Health에 등록하다.
Washington의 Surgeon General's Office에서 이미 배정 받은 바와 같이 나는 Harvard School of Public Health에서 공부하게 되었음으로 일행 3명, 황룡운, 나, 그리고 최명룡씨(Hawaii에서 맹장염 발병으로 동행치 못했음)는 기차여행으로 Washington을 떠나게 되었다. Dr. Whang은 이미, 미일 전쟁전, 도미 유학하여 Pittsburgh의과대학을 졸업한 경력이 있는 분으로 미국생활에 익숙할뿐아니라 영어구사능력이 충분하였으니, 나는 Dr. Whang을 선배로 대접하면서 많은 지도를 받았다. 즉, 학교등록으로부터 학업지도는 물론이고 서투른 미국생활에 적응하는 데도 많은 지도와 편달을 받았다.
10-1. 대학 등록과 기숙사 배정을 받음.
Harvard대학의 본부가 있는 Cambridge에서 기차를 내렸고 곧 대학본부 사무실로 찾아가서 소정의 등록절차를 마쳤다. 숙사로는 근처 Charles River 강변에 위치한 Lehman Hall이란 곳으로 배정을 받았다. 이 Lehman Hall에 입사하고 보니 이 기숙사는 가정을 가진 대학원학생을 위한 시설로서 아파트 같고 매우 한적한 곳이었다. 그런데 등교하여야 할 보건대학원은 Cambridge시가 아닌 Boston시에 위치하여 있었고 매일 지하철 편으로 통학을 해야 했다. Charles강을 넘어서 약 25mile이나 떨어져 있는 곳이고 보니 통학에 불편도 느꼈다. 식사는 의과대학 기숙사식당을 이용했다.
10-2. Concise 영어사전의 발견과 입수.
기숙사에서 일박하고 다음날에는 동내 구경 삼아 외출하였다가 Harvard대학 정문앞 Harvard Square에 있는 책방에 들렀더니 그 곳에서 뜻밖에도 내가 일본 요꼬하마 가도에서 분실한 일제 Concise영어사전의 복사판을 발견하게 되었다. 깜짝 놀랐다. 신의 가호를 받은 기분이었다. 곧 그 사전을 구입했는데 $3.50을 주고 산 기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 복제품 사전은 알고 보니 미일전쟁중 일본어를 배우는데 필요한 군용품으로 복사제본을 했다는 것이다. 여하간 나는 그때 영어실력이 몹시 부족하던 때인지라, 그 후 매일 매일 공부하는데 영어 사전찾기에 요긴한 반려로 삼았던 것이고 그 Concise사전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다.
10-3. 강의실에 첫 출석.
보건대학원 강의실은 Boston시 속에 있는 Harvard School of Medicine 구내인 Shattack Street로상에 위치한 별도건물 로서 2층 대리석 건물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의 보건대학원 학장, Acting Dean, 으로는 Dr. Huber란 분이었다. 이 보건대학원은 미국에서는 최초로 설립된 보건대학원으로서 제2차 대전 중이었다고 한다. 9월초가 개학인데 우리일행은 10월중순에 수강을 시작하였음으로 약 한달 반 가량의 강의는 받지 못한 형편이었다. 남녀학생 60여명인데 과반수이상의 학생은 미군의 현역의무장교들 이었고 급장역할을 맡은 분도 Full Col.로서 구주대전 때 군의관 단장이었다고 한다. 기타는 치과의사, 수의사, 간호원등 과 외국인으로는 인도, 필龼핀, 그리스, 구와테말라 그리고 한국인 인데 흑인학생은 없었다. 그때는 역시 흑인차별을 하던 때 였기 때문이다. 나는 강의실에서는 항상 Dr. Whang의 뒤 좌석에 자리잡았으며 강의가 끝나면 그 분의 Note Book을 빌려오고는 하였다.
10-4. 수강한 과목과 인상에 남은 내용들.
우리 세사람 즉 나와 Dr.Whang 그리고 Dr. Choi가 택한 과목은 다음과 같다.
Public Health Administration, Maternal and Child Health, Nutrition, Parasitology, Statistics, Industrial Hygiene등이었다. 이들 과목중 Statistics는 아주 생소한 과목이었으나 매우 중요한 과목이었고 Industrial Hygiene도 매우 중요한 과목으로 수강했다. 그런데 수강한 내용 중에서 신 지견으로 받아드린 다음과 같은 항목을 적어 본다.
10-4-1. 수혈(輸血) 과 Rh Factor.
혈액형 4-Type 중에는 Rh factor를 포함한 혈액형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즉, 이 Rh Factor형을 식별 하지 못하고 수혈하면 피수혈자의 혈액은 응고 내지는 용혈(溶血)한다는 것이다. 미국에 갈 때까지도 모르고 있던 지식 이다.
10-4-2. Social Security Act.
이 사회보장제도 조항에는 Medicare Clause 가 삽입되어 있으며 국민보건 특히 노년층의 보건유지를 위하여 보장하는 사회제도이다.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탁월한 제도로서 의료행정상 매우 중요한 항목임을 알게 되었다. Public Health Administration의 수강시간에 감명 받던 기억이다.
10-4-3. 모유(母乳)의 우선과 미숙아를 위한 Incubator.
Maternal Child Health를 수강하면서 알게 된 새로운 지식이었다. 즉, 유아영양에 대한 영양학적 지식의 발전으로 종래에 유행하든 우유인공영양은 비판을 받게 되었고 유아의 영양과 면역체 확보를 위하여서는 모유가 절대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유우선주의가 지배적인 의견이 된 것이다. 또, 미숙아 육성을 위한 보온, 인공호흡 그리고 산소보급을 위하여 고안한 Incubator장치는 획기적인 육아방법으로 등장 한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가 나한테는 처음 알게된 의학적 지식이었다.
10-4-4. Malaria Control 과 Mosquitoes에 대한 생물학적 지견의 응용
Tropical Medicine에 대한 강의에서 알게 된 내용이다. 즉, Tropical Malaria를 전파하는 Malaria Mosquito의 그 비상거리가 1 Mile 반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Anti-Mosquito Spray로 D.D.T.와 같은 분말살포를 1 Mile반경에 사전 살포하고 그 속에 병력이 주둔하면 Malaria예방에 유효하다는 것이다. 즉, 태평양전쟁에서 Tropical Jungle속에 주둔한 미군이 D.D.T.살포를 비행기에 의하여 받음으로서 Malaria리환을 모면하면서 항전하는가하면 일본군은 전혀 이러한 지견과 예방조치도 없이 항전했으니 병력소모가 극심했다는 사실과 대조하여 볼 수가 있었다. Tropical Medicine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이다.
10-4-5. Yellow Fever의 극복 과 Panama Canal의 개통.
이 항목도 Tropical Medicine과 관련하여 알게 된 지견이다. 즉, 불란서가 Panama Canal을 개통하려다가 실패한 원인이 Yellow Fever의 창궐로 노동력을 상실한 까닭이었는데 그때까지도 병원체 발견과 예방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미국이 Panama Canal 개척사업을 인수하면서 Yellow Fever에 대한 방역대책을 수립할 수 있게 된 것은 병원체 발견과 그 예방책으로 Vaccine을 사용하게 됨으로서 이다. 이와 같은 지식을 갖게되니 새삼 열대의학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10-4-6. Community란 용어와 그 뜻.
교실에서 강의를 듣고 있자면 거의 각과정 마다 용어 중에는 낱말로 Community란 말이 나오고 나에게는 생소하게 들어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 용어와 관련된 내용을 알게 되면 미국의 사회생활과 그 발전이 얼마나 Community라는 공동생활체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가를 알게 한다. 백인사회 발전에 전통적인 결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게 되었고 우리 한국 사람들과 같이 봉사와 협동정신이 약한 사회에서는 귀담아 들어야 할 용어라고 새겨듣던 기억이다.
10-5. Mrs. Barnabi.
학장 Dr. Huber의 비서이다. 학장보좌 이외에도 외국인 학생에 대한 관심은 유별하였다. 우리 한국인학생에 대해서도 Rockefeller 장학생임에 유의하고 그 장학재단과는 수시로 연락하면서 편의를 보아주었다. 더욱이 나와 동료 최명룡씨를 위하여서는 방과후에 영어 개인교수를 받도록 주선도 해 주었다. 그리고 이 Mrs. Barnabi와는 만 10년후에 재회를 하였으니 내가 제2차 유학으로 Boston에 왔을 때이었다. 매우 반가이 만났으며 다시 여러 가지로 신세를 끼치기까지 했다.
10-6. Boston의 교포와 그들의 동정.
내가 Boston에서 공부하던 1945-1946 사이에는 그 곳에 사는 교포라고는 모두 11명에 불과 했다. 즉, 남아 두명씩을 가진 두가정과 세사람의 Bachelor가 전부 였다.
첫째 가정 Homer Kim내외는 M.I.T.와 Chicago 음대졸업의 유식인 이었고, 둘째 가정 Norman Paik은 이민하여 온 분들이었다. 이들 교포들은 동포애에 굶주리고 지내든 처지이었는데, 나라해방과 동시에 유학온 우리유학생 일행을 만나게 되니 매우 반가워 한 것이다. 자주 만나서 동포애를 교환하게 되었고 한 달에도 2-3차례씩은 돌려가면서 만난 기억이다. 가끔 China Town에서 만나서 회식하면서 환담을 나누었는데 식사에 백반과 더불어 먹게된 중국음식은 매우 구미에 당겼고 대학식당에서 양식만을 먹으며 공부에 쪼들리든 때인지라 영양섭취와 피로회복에 많은 도음을 받았다. 그런데 지내면서 보니 그 두 가정은 서로 반목하는 사이임을 알게 되었다. 즉, Homer Kim에 의하면 이 박사가 영도하는 Korean Commission은 이 박사의 사이비(似而非) 애국심에 의한 독립 운동기관이고 미 국무부에서도 인정을 못 받고 있다는 것이다. 오래지 않아서 '그 계집 Francesca와 같이 미국으로 붸겨 올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한 가정 Norman Paik은 이 박사는 한국의 대통령이 될 것이고 하니 Korean Commission에서 요구하는 모금에는 응 하여야 하며 뒷날 본국에 돌아가면 '자기도 한자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아주 상반하는 사고방식이고 주의주장이다. 이미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재미교포들 중에는 이 박사를 반대하는 Group과 찬성하는 Group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즉, Hawaii를 통과 할 때나 Washington, D.C.를 지나올 때에도 경험한 것이며, 이곳 Boston에서도 또 경험하게된 것이다. 대체로 지식계급에 속하는 교포들은 이 박사를 반대하고 이민배경인 교포들은 찬성하는데 불순한 이해관계가 그 주원인 인 듯 싶었다. 이와 같이 이 박사의 경력과 그의 평판을 알고서 귀국한 나는 이 박사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게 되었고 이 박사정권의 보사부직원으로 봉사할 때도 그분의 인사행정에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Boston에서는 Homer Kim내외의 초청을 받고 Boston Symphony Orchestra를 구경 갔던 기억이 난다. 난생 처음으로 관람한 Symphony Orchestra이기도 했다.
10-7. 대학원 졸업과 M.P.H. 학위 수여 받음.
어학실력의 부족, 그리고, 생소한 학과목을 이수하여야 하는 대학원 공부는 실로 난항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철주야로 면학하면서 학위취득에 필요한 매번 응시에도 도전하여 매 과목에서 낙제만은 모면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데는 Dr. Whang의 도움이 많았다. 즉, Dr. Whang의 Note Book을 빌어 참작하면서 그 분의 조언을 충실이 받아들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하여 학업이 끝나고, 학위, M.P.H.,Master of Public Health, 수여식을 겸하는 졸업식이 거행된 1946년 6월 6일에는 Harvard대학본부가 있는 Cambridge의 대학 광장에 참석하였다. 나는 생전에 처음 입어보는 졸업 Gown과 술이 달린 사각모자를 착용하고 참석하니 감개 또한 무량하기도 했다. 각 단과대학별로 졸업생들이 운집하였고 그 졸업생들의 뒷 좌석에는 많은 선배 졸업생들이 참석했는데 그 중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들이 졸업생을 격려한다. 'Good', 'Very Good'을 연발하면서.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고 흥분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이날의 졸업식은 Harvard대학 창립 310주년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니 실로 미국에서 최고참의 대학임을 과시하기도 하는듣 싶었고 그러한 장엄한 졸업식에 참석했던 기억은 지금도 감회롭다.
11. Rockefeller 장학본부로 장학사를 방문 함.
어렵고 힘들기만 하던 학업이 일단락 되고 졸업식에도 참석하고 나니 마치 해방된 기분으로 몹시 몸과 마음이 가벼워 졌다. 앞으로는 미국 남부지방에 가서 약 3개월간의 실지실습을 하기로 되어 있었음으로 우선 New York에 있는 Rockefeller재단의 장학사를 만나고 Briefing을 받기로 하였다. Boston을 떠나기는 '46년 6월 13일 아침이었고 Greyhound Line Bus편으로 New York으로 떠났다. 이 Bus는 중간에 각 도시와 농어촌을 거쳐서 운행되는지라, 지나면서 여러 도시와 농어촌의 풍경도 전망할 수가 있었다. 동부 미국의 민정을 인상깊게 관망할 수가 있었다. New York에는 늦게야 도착하였고 미리 연락하여둔 숙소로 Korean Church를 찾아가서 투숙했다. 다음날에는 Rockefeller Center를 찾아가서 장학사를 만났는데 장학사의 사무실은 건물의 55층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창문을 통하여 보니 New York시내가 마치 Panorama와도 같이 펼쳐져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올라가 본 고층건물이었다. 그저 어안이 벙벙하기만 하였고, 이러한 내모습을 눈치챈 장학사는 매우 친절하게 접대하여 주었다. 장학사는 나를 위하여 배정하여 놓은 Schedule대로 남부 Field Trip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는데, 즉, 남부의 3 States, Kentucky, Tennessee, 그리고 Alabama에 대한 Briefing이었다. 실습여행에 필요한 비용 청구서양식 과 Stipend도 받았다. 이와 같이하여 지방실습에 대한 준비를 갖추고는 New York에서는 수일간 더 머무르면서 꿈에도 그리든 대도시 관광도 하였다. 편리하기 만한 지하철과 뻐스 편을 이용하면서 마냥 걸어다니든 기억이다. 별로 피로감도 느끼지 않고 Central Park속에서는 Vendor를 만나면 서서 요기하든 생각도 난다. 며칠사이에 구두창이 해져서 구멍이 나기도 하였으니 그때는 한참 혈기 좋은 청춘시대가 아니었던가!
12. Helman Keeper Hospital 참관.
남부로 떠나기 전에 우선 Detroit로 가서 그곳에 있는 시립 전염병 병원인 Helman Keeper Hospital을 참관하기로 하였다. 대규모의 시설과 철저한 방역조치가 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결핵균박멸의 신 항생제 Streptomycin에 대한 연구를 위하여 많은 전문의들이 집중연구 하는 곳이라고도 하였다. 때마침 이곳에서는 년례학회인 결핵학회도 개최 중이었고 우리 일행 유학생중 한 분이기도 한 최창순씨는 Michigan대학에서 학습을 마치고 이곳에서 실습중이기도 해서 오래간만에 만나기도 하였다. 앞으로 남부 Field Trip도 같이 떠나기로 하고 준비하였다. 최창순씨는 말한다! 즉, Streptomycin의 탁월한 효능과 그 치료효과는 거의 혁명적이라고. 미국 내에 산재하는 Sanatorium은 멀지 않아서 모두 문을 닫게 될 것이며 따라서 전국의 입원 Bed수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결핵병상수는 급격히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전세계에서 결핵병동이 그 자취를 감춘 것을 생각하면 실로 금석지감(今昔之感)이기도 하다.
13. Niagara폭포 관광.
Detroit에서는 결핵학회를 참관하고 최창순씨 와는 같이 남부여행을 떠나기로 했는데 가는 길에 Niagara폭포구경도 하자고 약속하고 Detroit에서 야간열차로 떠났는데 기차는 Canada영토를 거친다. 미국의 5대호를 돌아서 가는 것보다 직통거리가 되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기차는 열차의 승강구를 모두 봉쇄하고 질주한다. 까닭은 미국시민외의 외국인이 Canada령에서 도중하차를 못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따라서 폭포관광도 Canada쪽이 아닌 미국 쪽에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폭포는 보아하니 소문듯던 것과는 달리 별로 큰 인상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저 웅장하게만 전망했다. 금강산의 구룡폭포와 같이 아기자기한 산수풍경으로는 보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Niagara폭포는 그후 수십년뒤에 다시 찾게 되었고 관광도 Canada 쪽에서 할 기회가 있었는데 보아 하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그 관광 가치는 U.S.측 보다는 월등한 것으로 볼 수가 있었다.
14. 서재필(徐載弼) 박사를 심방 하다.
남부로 가는 중간이기도 한 Philadelphia에는 서재필 박사가 거주하고 계시고 아직도 해방조국에는 나가지 않고 계신다고 하니 Niagara에서 떠난 나와 최창순씨는 Philadelphia역에서 하차하였다. 교외에서 거처하시는 서박사를 심방할 때는 이미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마침 서박사 Clinic근처에서 한국인 교포 여인을 만나게 되어서 서박사 댁으로 전화를 걸고 래의를 전하게 되었다. 서박사의 장녀가 전화를 받았는데 박사는 감기로 불편하다면서 면회는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서박사는 우리가 유학하여 공부 마치고 귀국하는 유학생이란 내용을 알고서는 기꺼이 자기 Clinic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이었다. 인해서 서박사 Clinic에서 상면했는데 첫 인상의 서박사는 위풍이 당당한 노신사이었다. '그래, 한국의 정황이 어떻소'! 하시는데 한국 발음이 서툴음도 알 수가 있었다. 최창순씨가 주로 대화했다. '해방후의 정세는 매우 좋습니다', '새정부 수립을 위한 각계각층의 노력이 활발합니다.' 등으로 대답을 하니 서박사는 계속 침묵하면서 듣고만 있더니 정좌를 하면서 입을 여신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러 가지로 좋지 못한 어려운 이야기만 들려 오는 것이오!' 하면서 노성으로 힐난도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듣고만 있던 처지이었기도 하지만 내심 놀랍기도 하였고 계속하는 서박사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즉, 서박사 자신은 Hodge중장과 수시로 연락하고 있는데 이 박사는 Hodge중장과 불화 하다고 하며 자기를 귀국시키지 못하도록 압력을 쓰기도 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로 방해공작을 자행한다는 것이다. 나는 서박사의 신분 과 그분의 과거 이력을 잘 알지 못하던 때이었음으로 그저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서박사는 말을 계속하는데 '이승만 이가 뭘 알아야지'? 하면서 개탄을 하셨다. 후일에 서박사가 한 말과 그리고 해외에서 이 박사와 지내든 이야기를 알게 되니 서박사야말로 애국 애족하는 충정으로 독립운동을 하셨든 분이라고 알게 되었다.
15. Jefferson Medical School로 Dr.Cha를 방문하다.
서박사를 방문한 후 Philadelphia에서는 Jefferson Medical School로 Dr.Robert Cha를 찾아갔다. Dr.Cha는 교포 의학자로 고군분투하는 분으로 Jefferson Medical School의 내과교수로서 진단학을 담당하고 있는 분이었다. Dr.Cha의 강의도 청강 하였다. 많은 Humor를 섞은 강의에는 학생들이 모두 갈채도 아끼지 않는 것을 목격하였다. Dr.Cha는 한국에서 도미 하여온 F.M.G.,Foreign Medical Graduate, 들의 수련을 위하여서도 많은 지도편달을 하고 있는 분이었다. 그곳에서 잠시 민박한 나의 숙소도 Dr.Cha가 찾아주는 수고를 하였다.
16. 남부 3 주(州) 에서의 Field Trip.
Boston을 떠나서 New York, Detroit, Niagara 그리고 Philadelphia까지 약 20여일의 여행을 하고 나니 이제부터는 Rockefeller재단에서 주선한 남부 3 주 에서의 실습차 떠나게 되었다. 그 남부 3 주에서 한 실습의 개요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16-1. Kentucky 주 에서의 Field Trip.
남부로 가는 Greyhound Bus를 타고 Philadelphia를 떠났다. 주택지대와 농경지대를 통과하면서 그 지방풍경을 전망하였는데 일기는 차차 더워지고 뻐스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언어동작을 주의하여 보니 어딘지 모르게 New England 지방과는 다른 것을 알게 됐다. Kentucky의 Lexington을 지나가자니 그 유명한 Kentucky Blue Grass Field가 끝도 없이 전망되었고 군데군데서는 풀을 뜯는 말들도 보였다. 소문 난 Derby Horse들일 것이라고 짐작도 하였다. 목장 경계선은 백색난간으로 거의 한도 없이 뻗어 있는데 Blue Grass에 반영하니 찬란하기만 하다. 이야말로 천국에 찾아 왔구나! 하는 기분으로 바라보았든 기억이다.
이윽고 주 보건청에 찾아가니 예약한 주 보건관을 만났으며 래의를 이야기하고 Briefing을 받았다. 수일간을 Kentucky의 산간지대의 낙후한 보건상태를 시찰하기로 하고, 마침 이곳에 실습차 내도한 인도인 여의사, Harvard보건대학원 에서의 동창생, 와도 합세하여 실습을 같이 하기로 했다.
16-1-1. Mounted Midwifery Service.
지방의 산간 벽지에는 의료시설이 미비하니 해산하는 산모 보호를 위한 Midwifery Service를 제공하는데 있어서 Midwife는 말을 타고서 산간벽지의 산모를 찾아가는 것이다. 처음 보는 이러한 광경은 생각도 못한 것이었다. 여하간 산간벽지의 산모를 위하여서는 더 없는 복음이라고 보았다. 동행한 주 보건관과는 벽지 숙소에서 한 침대에서 자던 기억도 난다.
16-1-2. Pit Privy.
한데 뒷간이다. 비위생적인 농촌 뒷간 시설을 개량하고 예방 의학적 견지에서 처리하기 위한 간이변소 이다. 즉, 옥외에 설치하는 양변소는 집에서 5 meter이상 떨어진 곳에 설치하고 출입구와 창문에는 망사를 설치케 하는 것이다. 파리, 모기, 쥐등의 침입을 방지하는 것이며 10-20meter 떨어진 곳에 설치한 분뇨 탱크도 반드시 폐쇄하도록 하는 장치이었다. 이러한 예방 의학적 고려가 전무하였던 당시의 한국의 변소시설과 비교하면 본받을 만 한 위생시설 이라고 생각도 하였다.
16-1-3. One Room School.
인구가 희소한 농촌의 초등교육 시설이다. 교실 하나와 교원 한사람이 운용하는 학교이다. 즉, 각급 학생을 한 교실에서 지도하는 것이다. 2-3 명씩에 불과하는 각 학년 초등 학생들을 한방에 모두 수용 한 것이다. School Bus에 의하여 아이들을 광활한 농촌 지대에서 태워오고 태워가면서 교육시키는 제도이다. 나는 처음 보는 학교제도임에 내심 놀라기도 하였다. 한국과 같이 협소하고 인구 많은 나라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제도이기도 하다.
16-2. Tennessee주 에서의 Field Trip.
Kentucky주를 뒤로하고 Bus편으로 다시 남하하니 Tennessee주의 수도 Nashville에 도착하였다. 주정부 보건관과 만나서 Briefing을 받으니 실습여정으로는 약 2 주일간 예정으로 T.V.A., Tennessee Valley Authority,의 Malaria Control Program을 중심으로 하는 실습여행을 하자는 것이다. 주보건관과 같이 Knoxville로 이동하였다. T.V.A. Project는 연방정부의 주도하에 진행되는 거창한 Dam건설을 위시한 다목적사업으로서 소위 1930's Depression을 극복하기 위한 국가적 사업이기도 하다. 한창 진행중인 관개공사가 Tennessee River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었다. 즉, Tennessee River의 여러 군데 계곡에다가 다목적 Dam을 건설하는 사업으로서 홍수범람방지, 수력발전소건설, 그리고 부수 공업단지를 조성함으로서 실업자 구제까지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Dam을 건설하면 여러 곳에 저수지가 생기고 그 곳 에서는 아열대기후관계로 열대성 말라리아의 매개체역활을 하는 모기가 발생하고 번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열대성 말라리아 환자가 발생하고 보니 심각한 보건문제가 대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건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소위 Malaria Eradication Campaign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말라리아 모기요충이 성충하여 수면위로 날아오르기 전에 그 요충을 박멸한다는 생각이다. 방법으로는 원유(Oil)를 수면에 산포하여 요충이 성충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는 방법이다. 이러한 Campaign은 여러 곳에서 직접 목격도 하였고 관련 보건소에서는 환자 취급하는 상황도 관찰 할 수가 있었다. 요컨대, T.V.A.란 세계적으로 이름난 다목적 Dam 건설사업의 표본이기도 한데 미국에서는 경제적으로 낙후한 남부의 경제수준 향상을 위한 획기적 사업으로 등장 한 것이다. 초래한 보건문제도 열대의학의 원리를 십분 잘 응용하여 대처하고 있는 곳으로 보았던 것이다. 열대의학을 위하여 많은 시사를 주는 곳이다.
16-3. Alabama주 에서의 Field Trip.
남부 3주에 걸친 실습의 최후지 이다. Montgomery소재의 주보건부에 출두하여 Briefing을 받으니 실습지로는 주의 북부지방인 Huntsville을 중심으로 할 것을 권고 받았다. Alabama주는 소위 미국에서 말하는 Deep South에 해당한다. 즉, 아열대의 더운 지방이고 사람들은 사투리를 쓰며 행동도 느리게 보인다. 흑백인종차별, Segregation, 의 풍습도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말하자면은 공중식당, 공중변소 등에는 'White Only'라고 쓴 표식이 붙어 있고 뻐스는 뒤칸좌석에만 흑인은 자리잡을 수가 있다. 나는 뻐스를 타다가 모르고 뒷좌석에 앉았다가 백인들의 주의를 받기도 했었다. Huntsville을 중심으로 실습을 하게 되었는데 각처의 지방보건소를 심방 하면서 농촌 보건문제의 중심이 되는 모자 보건문제와 식품위생에 대한 예방 의학적 견지의 실습을 주로 하든 기억이다. 우리 한국과 같이 낙후된 보건행정을 위해 매우 참고가 되는 지식과 경험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Huntsville에서 실습하는 동안에는 뜻밖에도 서울에서 만나 알게된 퇴역한 미군병사와 만나기도 했다. 피차 매우 반갑게 만났는데 하루저녁에는 풍성하게 차려진 남부식 저녘식사에 초대도 받았다. 식구들과 둘러앉은 식탁에는 남부특유의 Fried Chicken과 Corn이 풍성하게 쌓여 있어 나는 배부르게 먹고 헤어진 기억이다.
이상으로 미국 남부 3 주에 걸친 실습은 모두 끝났고 Boston을 떠난 지도 이럭저럭 3 개월이나 되었다. 우리 유학생 10명은 Washington, D.C. 에 다시 모여서 같이 귀국의 길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음으로 Huntsville을 출발하여서는 일로 북쪽으로 향하였다.
16-4. 남부 실습의 의의(意義).
후진국인 한국에서 온 나는 실습지를 남부 3주로 받았는데, 그 까닭은 장학관의 나름대로의 배려가 있었다고 안다. 즉, 나는 실습의 주안목으로는 모자보건을 택한다고 하였으므로 민도와 보건상태가 비슷한 남부의 농번지대가 북방의 공업지대보다는 견문하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사실상 실습을 끝내고 보니 낙후된 농촌지대의 보건행정실태를 견문하면서 실습할 수 있었던 것이 매우 다행한 일 이었다고 생각하였다.
17. 다시 Washington, D.C. 로 집합 한 일행 10명.
우리 일행 10명은 각자 대학원을 졸업한 후 각처에서 자기들 전공에 대한 실지훈련을 마치고 귀국에 앞서 Washington, D.C. 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10월 중순경이었다. 단장 역할인 Dr. Choi와는 거의 일년 만에 반가이 만났는데 귀국에 관한 준비로 바쁘게 지내는 중이었다. 즉, 귀국길로는 기차로 대륙을 횡단하고 Seattle에서는 군용선박에 의한 태평양횡단을 한다는 것이다. 필요한 기차표와 선박표를 미 국방부 보건당국으로부터 입수하는 수고를 하였고 일행 중에는 늦게 집합하든 사람도 있어 그들을 수소문하고 독촉하든 기억이다. 일행 모두가 부플은 심정이었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17-1. Washington, D.C. 출발 Chicago 경유 Seattle 도착.
우리 일행은 Washington, D.C. 기차정거장에서 Pullman차에 올라탔다. 다리를 완전히 펼 수 있고 고급스럽고 품위 있는 식사가 나오는 식당차가 딸린 대륙횡단의 일등 열차이다. 이런 고급 기차를 타고 가니 한국에서 올 때 타고 온 군용비행기 여행에 비하면 참으로 편안한 여행을 한 것이다. Chicago를 경유하여 주야 3일간의 여행이었는데 Canada접경을 달리는 기차 창밖으로 펼쳐진 산야의 경치는 참으로 신비스럽기만 하게 전망한 기억이다.
17-2. Seattle의 인상.
Seattle역에 내려보니 역 구내에서 부두 선박장에 이르는 일대는 지저분하고 어수선했다. 알고 보니, 태평양전쟁때 군용기지가 되었던 관계로 매우 부산했던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만난 중년 일본인 남녀들은 우리 인상이 자기네와 비슷하니 반가워한다. 이야기를 건네 보니 자기네들은 얼마 전에 풀려 나온 전쟁 때의 격리자(Internment Camp Detainee)이었다는 것이다. Camp에서 나와 이곳 자기네 고향인 Seattle에 돌아와 보니 가산 집기는 온데 간데 없고 직장이었던 기차정거장에 와서 보니 모두 거칠어졌고 심지어 화장실에는 화장지조차 안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네들이 구내를 복구 중에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생필품, 예컨대, 설탕은 월 5 Lb배급이라는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고 전후에 도미 유학하고 방금 귀국하는 도중이며 한국에도 생활필수품이 귀하다고 했더니 자기가 배급받은 설탕 5 Lb를 나한테 선사하기도 하였다. 고맙게 받아 가지고 승선 한 기억이다.
17-3. 배 타고 태평양 횡단.
Seattle에서는 사흘을 기다리다가 배에 올랐다. 배는 군용 화물객선인데 2만5천톤이나 되는 배였다. 부두에 정박해 있는 배속에는 이미 많은 수의 군인과 민간인 그리고 선창 속에는 대량의 군수 식료품들이 적재되어 있었으며 우리일행은 갑판 상에 있는 객실에 자리잡게 되었다. 한 방에 두 명씩이 배당되었고 조망이 좋은 일등 선실 이었다. 나는 이처럼 큰 배에는 처음 타는 것이었고 태평양 횡단이라는 2주일 이상이나 걸리는 항해 여행도 물론 처음이었다. 출항하니 큰 배인데도 동요한다. 배 멀미로 고생하다가 항해하기를 사흘 가량 하고 나니 배멀미는 가라안고 안정을 되 찾았다. 다시 땅을 밟을 때까지는 회복이 안되든 기억이다. 많은 군인이 탄 것은 일본 점령의 군인들과 교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며 일반 시민복의 승객은 역시 미 군정 하에 임용되는 직원(Civilian Employee) 이라고 한다. 즉, 우리 일행은 미 군용선의 객실인 갑판 위의 선실에서 특별대우를 받은 것이다. 첫 기항지는 Guam섬이었다. 갑판에서 내려다보니 엄청난 량의 군용식품이 선창에서 하역되면서 부두시설의 냉동창고속으로 옮기어 지는 것을 보았다. 그 거창한 물량, 예컨대, 소고기, 돼지고기, 야채, 과일 등등이 엄청나게 많은 량임을 보고는 놀라기도 하였다. 다음 기착지는 요꼬하마 이었고 이 곳에서는 다수 군인들이 하선하였고 군용물자 하역 또한 대량이었다. 그런데, 이곳 요꼬하마 부두에는 일본인 노동자들이 거들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한사람은 배 갑판에 비치되어 있던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먹다 버린 음식물을 뒤져 먹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패전한 일본국민의 궁핍상이라고 인식하니 마음 아프던 기억이다. 패전한 일본은 앞으로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패망국이 되었구나 하는 인상을 받기도 하였다.
끝으로, 인천에는 항해 2주일 넘어서 입항하였고 우리 일행은 곧 하선하여 인천 기차정거장으로 이동하였다. 서울로 가는 미군용의 기차에 올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낡아빠진 기관차가 증기발생이 부족하여 못 움직인다는 것이다. 미 공병들은 다른 기관차로 바꾸어 운행 하고저 부산한데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게 되니 서울역에 도착한 것은 거의 자정이 가까워서 이었다. 서울역 푸鲛드홈에 내려서니 아들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시던 아버지와 그리운 만남을 하였다. 멀리 미국까지 다녀오는 아들과 만난 아버지의 감격하시든 표정은 지금도 눈에 선 하기만 하다. 나는 풍요하고 편리하기만 하던 미국생활을 하다가 돌아오니 춥고 궁색한 장면이 전개되는 것을 인천 역에서 부터 절감 한 것이다.
18. 미 군정청 보건후생부에 출근하다.
당시 미 군정청 보건후생부 청사는 을지로에 있는 일제 때의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었다. 첫 출근을 하여 보건 부장이던 이용설 박사와 만나서 귀국인사를 하였다. 그랬더니 이 박사는 우리일행에 대한 근무 부서 배정을 하였고 나는 예방의학국의 모자보건과 일을 맡도록 임명을 받았다. 수일 후에는 이 부장이 베풀은 우리일행을 위한 환영연에도 참석하였고 각자마다 미국 유학한 소감을 피력도 하였다. 나는 좀 색다른 각도에서 미국 기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더니 참석자들한테서 재미있고 유익하다면서 박수갈채를 받은 기억도 난다.
18-1. 난항하는 보건행정.
미 군정 하에 운영되던 과도정부는 새로 탄생한 한국정부로 이관되었는데 보건후생부는 신생 사회부에서는 일개 국으로 강등되어, 즉, 보건국으로 격하되어서 운영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의 직위도 예방의학국의 모자보건과가 아닌 단일 보건국 소속의 보건과장으로 보직되얻고, 이때, 보건후생부의 차관직이었든 Dr. Choi는 사회부 보건국 직제에서는 보직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자연 해직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보건 행정기구가 격하됨에 대한 불평과 비판은 의료계는 물론이고 일반사회의 비판에서도 정부의 기구는 불합리하다고 지탄을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부조직법 개정의 상정을 보게되니 보건국은 독립부처인 보건부로 갱생하는 경로를 밟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6-25동란에 휘말리게 되었고 심지어 부산 피난정부라는 곤경을 겪어야만 했으니 보건행정발전에는 많은 애로가 가로 놓였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곡경을 거치면서도 피난부산정부 때는 보건부의 의정국장직에 있었으며 10여 년 간의 정부직에 봉사 한 것이다. 그러던 중에 다시 도미유학 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즉, Harvard 보건대학원의 Dean Peron의 초청을 받게되어 제2차 유학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소위 Refresher Course의 권고를 받고 떠나는데 약 2년 간의 미국체재를 예견하였으며 직위보존은 한국정부의 직제상 허용규정이 없음으로 사직하였다.
이상과 같이 난항하던 보건행정을 경험하는 중에서도 앞날의 의료보건행정의 골격을 형성하고저 입법 조처한 내용을 적어 보면은 다음과 같다.
18-2. 보건소법 입안.
나는 도미유학에서 귀국해서 과도정부의 예방의학국 모자보건과에 집무하면서 제일먼저 착수한 것은 앞으로 한국보건행정을 추진함에는 지방보건행정의 기간이 될 보건소법이 절실하다고 생각하고 그에 관한 법 즉 보건소법을 입안 한 것이다. 이 법을 성취시키는데는 법제처를 거치면서 법조문을 작성하여야하며 동시에 재무부 예산국을 거치는 예산확보가 필요한 것이다. 적지 않은 예산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재무부에서는 정부의 재정난을 이유로 일절의 신규사업은 금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보건소법은 입법이 불가능 한 것으로 맴돌게 되었고 더욱이 6-25동란을 겪어야 하는 정부 형편으로는 입법은 보류되고 만 것이다. 후일 그리고 또 후일로 미루다가 보건소법은 결국은 입법취지대로 국회를 통과하면서 늦게나마 발효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보건소법의 기초가 된 것이다.
18-3. 국민의료법의 입법이 부산 피난국회를 통과하다.
부산 피난정부때의 일 이다. 이 법을 입안기초 할 당시 나는 보건부의 의정국장직에 있었다. 해방후 아직도 의료법이 제정이 안되었고 일제 때의 위생경찰제도가 그대로 계승되던 때이었음으로, 의료행정상 특히, 의료업자를 취급하는데는 필요불가결의 입법이었던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보건소법과는 달리 별로 큰 예산조치는 필요치 않음으로 입법은 순조롭게 정부에서 국회로 상정 됐던 것이다. 그러나, '의료업자(醫療業者)를 규정함에 있어서는 한의사(漢醫師)를 신규로 규정하였음으로 의료업계로부터 시비를 받게 되었고 국회에서도 심의통과 과정에서 갑론을박하는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고 보건 분과의원장이기도 했든 이용설박사는 과도정부때 보건부장관의 경력도 있고 하여 발언권이 셌던 분인데 한의사 자격인정을 반대함으로서 분과의원회에서는 상당한 론난을 겪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국회의원의 대다수는 한의사 제도를 옹호하였음으로 결국은 원안대로 입법화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경위로 한국 최초의 국민의료법은 부산 피난국회를 통과하여 입법이 되었고 때는 1951년 8월 이었다. 이와 같은 경위로 한국의 '의료업자'로는 의사, 치과의사, 그리고 한의사 가 동격인 업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특기할 것으로는 이 법이 입법될 때까지는 한국에는 한의사 양성기관인 한의과대학은 전무하였을 때인데 서울수복을 하게되니 한의학 교육기관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면허규정에 의한 한의사 국가 시험에도 응시 할 수 있게 된 사실이라고 하겠다. 또 동시에 해방후 문란하던 무면허 의사의 횡포도 차츰 살아지게 된 것이다. 나는 이 법령이 통과 된 후 시행령도 구비시키고 '국민의료법 해설' 이란 책자도 발간하여 일반 의료업자의 편람에도 기여하였다.
19. 재차 도미 유학
1954년 10월 이었다. 세계일주여행에 나선 Dr. Peron, Dean of Harvard School of Public Health과 수행하든 Dr. Leavel, Prof. of Public Health Administration이 서울에 와서 보건부를 내방하였다. 이 두분과 만나서 요담 하다가 나의 Harvard유학 한 것이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Refresher Course를 받기 위하여 다시 한번 도미 유학을 함이 어떻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천재일우의 호기라고 여기고 즉석에서 기꺼이 받아 들였다. Scholorship은 American-Korean Foundation, Dr. Rusk, New York의 창시자로 이 A-K Foundation의 Sponsor임,의 Scholorship을 받기로 하였다. Dean Dr. Peron은 내가 10년전 제 일차 도미 유학당시에는 Washington, D.C. 에서 만난 Gen. Peron, 즉, 미군 육군 군의감으로 재직했었고 그 후 Harvard보건대학원의 정식 Dean으로 부임 한 분으로 구면 이기도 했다. 10년전 유학당시는 Dr. Huber란 분이 초대 보건대학원장직에 재임하고 있었는데 그분의 직분은 Acting Dean 이었으니 Dr. Peron은 제 2대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정식 Dean으로 승격한 분이기도 하다. 나는 재차 유학 길을 떠나면서 보건부 직분인 의정국장직을 사임하였다.
19-1. 대학 등록과 선택한 과목
Harvard보건대학원에 등록한 것은 1955년 6월 초 이었고 선택한 과정은 M.S.H.(Master of Science in Hygiene)이었다. 이 M.S.H. Course의 수강을 위하여서는 그 과정의 성격상 두 학교, 즉, Boston의 보건대학원과 Cambridge의 법과대학에서 수강을 하여야 했다. 예컨대, Boston 보건대학원에서는 Public Health Administration, Epidemiology, Hospital Administration, Maternal Child Health, Parasitology등을 택했고, Cambridge의 법과대학에서는 Public Administration과 Finance를 청강했다. 그런데, 이 법과대학에서 청강한 Finance는 매우 해득하기가 어려운 과목이었고 흡사 제일차 유학때 수강하든 과목 Statistics과 같은 고생을 하든 기억이다. Epidemiology시간에는 한국 38선 지대에서 유행하든 원인불명의 출혈성피부염, Hemorrhagic Fever,에 대한 토론에 참여한 기억도 난다. Public Health Administration과목은 내가 전공하는 분야이었고 장차 Doctoral Course, 박사과정 으로 여기든 터이었으므로 지도교수 Dr. Leavel은 자기의 조교 한명을 특별히 나에게 배정해 주기도 하였다.
19-2. M.S.H. 학위 수여식에 참석.
M.S.H. Course가 끝나니 학위수여식이 Cambridge본교에서 거행되었다. 1956년 3월 12일 이었다. 이날은 Harvard대학 설립 320주년에 해당하기도 했다. 10년전 제일차 유학때 받은 M.P.H.학위수여식에 겪은 감명과 기억이 있었음으로 별로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19-3. 서두수(徐斗秀)교수와의 면접과 조언을 받다.
서교수는 교환교수자격으로 당시 Harvard대학 문학부에서 언어학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을 때이다. 이 분은 남에 대한 배려가 남다르게 섬세하고 생각도 깊은 분 이어서 동포 유학생들의 문제해결을 위하여서는 많은 도음을 주시든 분이다. 나는 M.S.H. 일년Course가 끝나고 계속 공부하여 Doctorate Course를 계속 할 계획이었으나 의외에도 한미재단에서는 학자금 연장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부득이 다른 장학기관을 찾아보기로 하고 서교수와 의논 한 것이다. 그러나 몇몇 장학기관과 접촉을 하여보니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서교수는 대안으로 당분간 취직이라도 하여보라는 권고이었기에 California소재의 Monterey에 있는 미 육군 Language School에 이력서를 제출하였다. 강사자리가 나는 대로 강사로 출강할 수가 있다기에 그곳에 가서 대기하기로 하고 Boston을 떠나게 된 것이다.
20. Monterey에서 대기하다가 귀국하다.
Monterey에 와서 보니 이곳에는 Language School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많은 교포와도 만나게 되었고 학교당국에서는 강사 자리가 나는 대로 곧 통지하여 준다기에 대기하였다. 이럭저럭 3개월이나 지체하고 대기하였으나 취직은 허사이었다. 그간 시간 여유도 있고 하니 친지들과 같이 지방여행을 했는데 많은 것을 견문하게 되었고 미국의 풍토 그리고 생활내용에 대한 공부가 됐다.
20-1. California주와 Nevada주를 일순 하는 승용차 여행.
순회여행 일행으로는 교포 조씨, Language School의 강사,와 한국에서 유학온 고교학생 2명과 모두 4명이 같이 떠나게 되었는데 조씨가 운전하는 Cadillac차에 동승하였다. 행로는 Monterey를 출발하여 북쪽으로 향하여 S. F., Sacramento와 Lake Tahoe를 거처서 Nevada주로 들어갔으며 그 곳의 접경도시 Reno를 거치면서 남하하였고 도박의 도시로 유명한 Las Vegas에 들렀다. 그 다음에는 다시 가주로 되돌아와서 Los Angeles를 경유하고는 북상 길을 타게되니 가주를 종단하고서 Monterey로 돌아 온 것이다. 약 일주일간이 소요된 이 장거리 운전여행에서는 많은 견문을 하였고 깊은 인상도 받았는데 그 대강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차 운전으로 수고한 조씨는 이미 미국생활에는 어느 정도 익숙한 분이었으므로 행로에도 밝았고 지방물정에 대한 설명도 잘 하여 주었다. 가주의 수도 Sacramento를 거쳐 북상하니 Sierra Nevada의 고산지대에 접어들었고 Lake Tahoe의 산수절경에 접하게 되었다. 이 호수는 세계최고의 수위에 있다고 하며 진초록의 수면이며 주위환경은 천연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보아하니 여기가 바로 선경이 아닌 가도 싶었다. 그간 세월이 흘러 현재는 많은 유락시설이 설치되었으니 경관은 손상되었고 매우 아깝게만 여겨지기도 한다. Reno에 진입하니 처음 보는 Casino시설을 보았고 Slot Machine을 돌리다 보니 한 밤중이 되었고 약 60여$을 따 가지고 새벽이나 되어서 Motel에서 일 박을 한 기억이다. Las Vegas로 달리는 길은 처음 타보는 사막 길이었고 일몰한 Las Vegas의 야경을 전망하니 그저 휘황찬란 하기만 하였다. Casino속에서는 도박에 골몰하는 인파가 북적대면서 어지러운 별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또 Slot Machine에 손을 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돈을 잃은 결과가 되었다. 즉, Reno에서 딴 돈 60$ 은 물론 내수중의 돈도 45$을 잃고서 퇴장 한 것이다. 이 까닭에 도박은 절대로 다시 손댈 것이 아니라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나는 도미하여 영주하게 된 후 도 몇 차례 Las Vegas관광을 하였으나 그 곳에서 도박한 일은 없다. 사람들의 요행심을 이용하여 골탕먹이는 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경원하곤 한다. Las Vegas를 떠난 다음에는 피로에 못 이겨 차를 노변에 세우고 낮잠도 잤고 Highway노변에는 Fence장치가 없을 때인지라 많은 야생동물이 질주하는 차에 치어 죽은 것도 보면서 Los Angeles에 들어 왔다. 이 곳 에서는 유명하다는 Hollywood동네를 일순 하였으며 Topanga Pass를 넘어 설 때는 지금의 Freeway I-5의 확장공사가 한창 이었다. 그 광범위한 대규모 토목공사로 산악전체를 굴착하는 광경을 보면서 서행하든 기억 난다. 지금도 Topanga Pass를 넘을 때는 그 때 보던 생각이 새롭기만 하다. 그 다음에는 Reedley에 들어서서 Kim Brothers Farm을 찾아갔다. 이 농장에는 때 마침 신종이라는 Nectarine과실을 pick 하는 Summer Job을 하고 있는 교포 남녀학생들과도 만났다. 그 다음에는 Monterey로 돌아 왔다. 이상과 같은 여행으로 미국 생활에 대한 많은 공부를 한 것이다. 뒷날 내가 U. N.직에서 정년퇴직 하고는 미국에서 영주하게 되었는데 그 때 여행에서 받았던 감명이 주거를 California로 선택하는데 기여하였다고도 믿고 있다.
그 때 받은 감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기후 풍토가 좋다.
2). 광대한 토지는 앞으로 개발할 여지가 많다.
3). 관개사업이 발전되고 있다.
4). 농, 축, 수산물 이 풍부하며 양질이다.
5). Infrastructure인 교통, 통신, 동력 이 계획적으로 잘 발전되고 있다.
6). 교육수준 이 높다.
7). L. A.는 신흥도시이고 각국에서 모여든 다인종사회이다.
8). 따라서, 가주는 기회의 땅이다. 등등의 인상을 받은 것이다.
20-2. San Francisco에서 배에 오르다.
Monterey에서 지체한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났으나 학교당국에서는 별반의 통지도 보내오지 않고 한미재단에서 공급한 귀국용 선박표의 유효기한도 임박하여지니 취직할 것은 단념하고 귀국하기로 하였다. Oakland부두에서 출항하는 화물객선에 올라서 태평양을 횡단하게 된 것이다. 10년전에 Seattle에서 미 군용화물선을 탄 이후 두 번째로 탄 태평양 횡단선 이다. 승선하니 상갑판 선실에 배당 받은 선실에는 2명씩이 동거하게 되었다. 나와 같이 한 방을 쓰게된사람은 한국인 유학생으로 미국 남방 모대학에서 2년간 석사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든 로신영(盧信永),후일 전두환 정권때 국무총리직에 올랐던 사람,씨 이었다.
나와는 년령차이도 있고 나의 한국정부 직위 등도 알게되니 자기가 앞으로 취직할 문제에 대한 의논도 하였다. 즉, 귀국하면 장차 무슨 방면으로 구직할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참고로 하라고 하고 권고하기를 이미 한국에서 고등고시 외교과에도 합격한바 있다고 하니 불문곡직하고 귀국하는 대로 곧 외무부에 취직해보라고 하였다. 로씨와는 그후 아직껏 한번도 다시 만난 일은 없으나 그가 외무부에 취직한것이 그 당시 귀국선의 선실 속에서 내가 강권한것이 주효하였는지는 모르겠다. 이 선박에는 여러 명의 한국동포가 미국유학후 귀국하는데 한미재단에서 공급한 탑승권의 혜택을 받은 것이다. 부산항에 입항할 때까지는 피차 심심치 않은 유학담을 교환한 것이다. 망망 대해를 지루하게 횡단하는데는 신물이 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부산에서 육지를 밟으니 원기도 소생하였고 기차 편으로 서울에 돌아오니 가족과는 신문로집에서 오래간만에 상봉 한 것이다.
21. 서울에서 낭인 생활 하다가 안과 임상에 복귀하다.
보건부는 도미유학 차 출발 할 때 이미 사임한지라 공적관련이 없음으로 귀국보고의 의무도 없고 하여 찾아가지도 안하였다. 집에 주로 있으면서 낭인 생활을 당분간 계속 하였다. 이럭저럭 1년정도 낭인생활을 하고 보니 생계에 대한 핍박도 받게 되고 하니 본시 전공하든 안과 임상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오랫동안 임상에 격조하였음으로 우선 손을 익숙히 하고자 소공동에 있는 공안과 에서 환자를 보기로 하였다. 공안과의 공병우박사와는 피차 안과 전문의로서 지면이 있고 내가 다시 임상에 돌아간다고 하니 전적으로 찬조하는 것이었다. 6개월간의 환자 진료를 하다가 떠났다.
21-1. 송안과 개업과 진료생활.
공안과 에서 많은 환자를 진료하면서 수련하였더니 환자취급에도 익숙해 졌으며 나의 호구지책도 강구하여야 하겠음으로 단독개업을 결심하게 되었다. 마침, 종로 1가의 상가로 내가 소유하든 2층 건물이 있었으므로 그 2층을 수리하여 안과 진료실로 사용하게 되었다. 1957년 10월 이었다. 처음 하는 개업이고 상술에도 어두운지라 환자집산에는 시간이 걸렸고 이럭저럭 8년 간의 개업을 계속 하였다. 그 동안에는 4-19학생봉기사건으로 종로 통에서 야기된 경찰의 진압총격사건이 전개되는 것도 관망하였다. 혼돈 하는 한국정국 과 사회생활에 적지 않은 환멸을 느끼게 된 것이다.
21-1. 주희(柱熙)의 미국유학 지망.
세월은 유수와도 같다더니 집안의 아이들은 성장하였고 학교진학도 주희는 어느덧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더니 서울의대 예과로 진학하였으며 부실한 예과수업에 실증을 느끼면서 미국으로 유학할 것을 희망하였다. 도미 유학에 필요한 응시, 문교부 시험 과 미 대사관 시험등, 에는 합격하면서 준비를 서두르는 것이었다. 나 역시 개업에는 실증도 났고 혼돈 하는 한국사회에도 염증을 느끼든 참 인 지라, 내가 해외에 근무처를 구하면 가족이 모두 같이 출국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세계보건기구, WHO/UN,에 이력서를 제출하였다. 이 구직 문의에 대한 세계보건기구로 부터 받은 회답은 희망적이었다. 따라서, 주희의 도미 유학에도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Mt. Union College, Ohio,에 입학을 신청하고 새학기부터는 등교하기로 한 것이다. 내가 Uganda취직으로 가족동반 출국 할 적에 주희도 동반하여 출국하였든 것이다. 19세 때이었다.
22. Uganda/East Africa, Mulago Hospital에 취직과 출국.
해외 취직의 기회는 겹치게 되었다. 즉, 세계보건기구,WHO/UN,의 직장확보와 Uganda정부가 초청하는 안과의사 선발시험에 합격 한 까닭이다. Uganda정부의 한국의사 초빙은 한국정부 외무부를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고 외무부시행의 응시 선발된 6명의 의사에 대한 출국은 '초청이민'의 취급을 받게 되어 가족동반으로 출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출국하는 일행 중에는 그 가족 중에는 19세 이상으로 병역의무 필증도 필요하였으나 '초청이민'이란 특혜를 받게 되어 모든 가족이 다 같이 무난히 출국하였다. 우리 가족 5명을 포함한 6명의 의사들의 가족은 모두 처음 타 보는 비행기이었으며, 나는 처음이 아니었으나, 해외여행의 비행기를 타고 출발 한 것이다. 김포공항을 떠나서 홍콩, 봄베이, 에이든, 나이로비를 경유하여 Uganda의 수도 Kampala에 이르는 장거리 비행을 한 것이다. 일행이 Nairobi에 도착하니 안광호 주 케니아 대사의 영접을 받았다. 시원한 고지대, 6,300Ft., 나이로비에서 1박 하고는 다음날 Uganda의 수도 Kampala에 도착하니 그 곳 에서는 김종한 주 우간다 참사관의 영접을 받았다. 일행 모두가 걱정하든 열대기후는 Kampala가 고지대, 5,200Ft., 에 위치하고 있어 흡사히 한국의 초가을과도 같음을 알게 되니 모두들 안도의 숨을 내쉬기 도 하였다.
22-1. Mulago Hospital의 안과의로 봉사.
나는 수도 Kampala에 신설한 Mulago Hospital에 일행중 오철환 동료, 내과의, 1명 과 같이 2명이 배치되었는데 나는 전공인 안과진료에 봉사하기로 한 것이다. Mulago Hospital은 500 Bed 수용 능력을 가진 4층건물로 영국이 통치하든 East Africa 3국 이 각각 독립국이 되는 동시에 영국으로부터 증여 받은 병원이며 장차 신설할 의과대학의 부속병원 역활도 할 기관이었다. 따라서 병원운영은 전적으로 영국식이었으며 직원도 대다수는 영국의사 와 간호원 이 주가 되어 있었다. Uganda본토인 출신의 의사는 극히 소수이었음으로 여러 선진국으로부터 의료요원을 초빙 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형편 이어서 안과에도 초빙의사인 Dr. Hadija, Yugoslavia인, 와 내가 진료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곳 안과에서 1년 반 가량의 진료봉사를 하는 동안 많은 환자진료를 하였으며 큰 수술을 한 예 만으로도 백내장 수술이 76명, 전안구 적출 수술이 18명이었든 기억이다. 이미 적은바와 같이 나는 세계보건기구, WHO/AFRO,에 취직이 허용되어 대기중 이기도 하였는데 급기야 근무지의 배당을 받게 되었다. 즉, African Region /Brazaville /Congo 소속이 되었고 부임지는 Tanzania로 확정되었다. 따라서 Mulago Hospital의 안과봉사는 사임하였고 3개월간의 년가를 미국과 한국에서 즐기다가 임지 Tanzania로 부임한 것이다.
22-2. Uganda의 물정.
Uganda란 영국 식민지 통치하 의 East Africa 3개국 중에서 독립한 나라이며 제일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기후풍토가 좋고 토지가 비옥한지라 농산물 소출이 많아서 자급자족은 물론, 수출도 하고 번성하는 나라이다. 특히 외화 획득으로는 양질의 Coffee와 Cotton 그리고 Cattle Beef를 생산함으로서 내실한 신생국가로 출발한 나라이기도 하다. 내가 Uganda에 1년반 체재 할 때는 매우 살기 좋은 곳으로 인상 받았다. 그러나, 내가 떠난 후는 Ide Amin이란 토착군벌이 집권하면서 독재로 돌아섰고 재래의 토후 족을 배척하는가 하면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인도인을 배척하는 등 폭정을 자행 한 것이다. 그래서 국정은 문란하여지고 사회는 혼란하게 되니 경제 또한 파탄으로 몰아 가게 된 것이다. 나는 이미 Uganda를 떠났으며 옆나라인 Tanzania에서 WHO/AFRO고문관으로 재임중 이었음으로 직접 영향은 안 받았으나 관망하자니 가슴 아팠으며 동정도 많이 했다. 역시 미개민족 인 지라 현대 문명에 뒤지는 것으로 알았다.
23. WHO/AFRO, P.H. Advisor로서 Tanzania에 부임.
Tanzania로 부임발령을 받은 것은 1966년 말이었다. 마침, 년가 3개월을 이용하게 되어서 Kampala를 식솔과 같이 떠남에 있어서는 당시 Uganda 주재 공사이던 김영주씨와도 작별인사를 하였고 우선은 한국으로 가기로 하고 홍콩을 경유하였다.
서울에서는 약 1 개월 반을 휴식하면서 조상 성묘도 하고 오래간 만의 고국 산천 관광도 하였다. 그 다음에는 나머지 휴가 1개월 반은 Chicago경유로 미국에 가서 Mt. Union College, Ohio,에서 유학중인 큰아들도 찾아보았다. 이와 같이 년가여행을 마치고 임지 Dar es Salaam에 도착하니 처음으로 세계 일주 여행을 하고서 새로운 직장 으로 부임한 것이다. Dar es Salaam에서는 WHO/Representative로 재직하던 Dr. Roig를 만나서 부임 인사를 하였다. 이 Dr. Roig는 Cuba사람으로 6-25 한국전쟁 때는 세계보건기구 직원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있었으며 전주(全州)에 주재근무 하기도 한 구면으로 피차 반가운 재회 인사도 교환한 기억이다.
23-1. Communicable Eye Diseases의 Survey와 대책.
Dr. Roig와 나는 WHO/AFRO Assignment(직책)을 타협하였는데 주요 용건은 Brazaville/Regional Office에서 보내온 Field Work에 대한 Instruction을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Field work에 필요한 Land Rover 2 대와 승용차 1대는 이미 배달되어 왔다고 하면서 그 차들의 Keys를 넘겨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Field Work에 대한 준비로는 Morogoro, Dar es Salaam에서 서쪽으로 50 Miles 상거,에 가서 주둔하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Dr. Roig와 사무타합을 마친 다음에는 Tanzania 정부의 보건 당국을 방문하였다. 소임인 Plan of Work, Epidemiological Survey of The Communicable Eye Diseases,에 대한 설명을 하였고 동시에 Field Work에 동반할 Counter-Part Worker, Tanzania의사, 의 배정도 요청하였다.
23-2. Morogoro에 주둔.
Morogoro는 Dar es Salaam 수도 다음가는 Tanzania의 제2의 도시이다. 이곳으로 이동하여 사무실을 설치하면서 Plan of Work, 즉, Epidemiological Survey of The Communicable Eye Diseases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본시 이 Plan은 Geneva소재의 WHO/HQs의 Project인 Trachoma Control의 일환임을 알게 되었다. 이미 북 아프리카 인 Sudan국에서는 이 Plan에 의한 Campaign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내가 맡게 된 Tanzania Project라는 것은 Sahara사막 이남에 대하여 시도하는 첫 번째의 Campaign인 것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Campaign의 동질성에 입각한 공동 보조를 취할겄이 긴요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즉, 직접 견학을 Sudan에 가서 현지에서 하기로 하고 그 곳에 출장하여 많은 것을 견문을 하고 돌아왔다. 그 다음에는 Campaign에 필요한 각종 Formula는 Geneva HQ로부터 입수하였고 Survey에 필요한 지역으로는 Dodoma주, 약 100 Miles 상거한 서쪽사막 목초지대,를 선정하기로 Tanzania보건당국과 협조하였다. 이와 같이 하면서, Morogoro에는 약 6개월간을 Plan of Operation의 준비기간으로 하면서 체류하였든 것이다.
23-3. Dodoma에 주둔하면서 본격적인 Campaign.
Morogoro에 주둔하면서 준비한 Plan of Work은 Sudan에 가서 Field trip한 경험과 WHO HQ에서 제공받은 Survey Formula를 확보함으로서 거의 완료하였음으로 Dodoma주로 이동 하면서는 본격적인 Survey실천을 하게 되었다. 즉, 주둔할 사무실의 설정, Project의 Counterpart Worker로 Tanzania보건부가 제공한 R.M.O.(한지의사), Dr. Gomile의 영입, 그리고 WHO/AFRO에서 파견한 Project Assistant인 Male Nurse, Mr. Ayoub,아랍사람,을 합세하여 일을 시작 한 것이다. Survey는 Dodoma주의 전체주민에 대한 Random Sampling Method를 채택 한 것이다. Field Work은 Land Rover의 운행에 의하여 진행되는데 광범위(한국의 경기도 정도)한 지역인지라 아침 일찍 출발하면 저녁 해질 무렵에 돌아오는 일정이 계속 되었다. Dodoma주는 아열대기후의 사막초원지대이고 주민은 격리되어 거주하는데 생업이 방축업인 관계로 그 주거지대의 위생상태는 아주 원시적이고 비위생적이다. 즉, 곤충, 그 중에서도 파리와 쇠똥으로 둘러싸인 생활 환경이다. 따라서 전염성 안질이 유행하여 시력 장해를 초래하는 것이다. Random Sampling Survey의 대상으로는 30개 부락을 선택하였고 이 Survey는 장장 2년이 걸렸다. 검진 후 치료기간 까지 합산하면 거의 3개년이 소비 된 것이다. 집계한 안질이란 거의가 Trachoma환자이었고 적게는 35%, 많게는 65%에 달하는 고율의 이환율임을 알게 하였다. 이러한 급만성의 Trachoma성 결막염에는 여러 가지의 합병증을 발견하게 되는데 예컨대, Trachoma Pannus, Enteropium, Trichiasis 그리고 Cataract등으로 상당한 시력 장해를 초래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이상의 역학적 검진에 대한 종합통계는 Nairobi, Kenya, 소재의 WHO/Statistics분실에서 분석 집게 되었고 Geneva HQ에는 WHO/AFRO를 거쳐서 보고하였다. 보고서는 'Pilot Communicable Eye Diseases Control Project-Summary Report, Sept/68-May/70'라는 제목이었다. Sahara사막 이남의 Trachoma Epidemiology에 대한 통계자료로 기리 보존 될 것이다. 치료용 안약으로 채택한 2.0% Terramycin Antibiotic의 효과는 실로 획기적이었음으로 WHO/Geneva HQ에서도 공인 치료제로 채택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3년여에 걸친 그리고 5만 miles를 넘는 Field Trip 은 일단락을 지었으며 Project는 끝난 것이다. 그래서 다음 임무를 대기하기 위하여 Dar es Salaam에서 대기 하기로 하였다. 1970년말 이었다.
이 때 나의 가정 환경은 둘째와 셋째아들이 Kenya의 수도 Nairobi소재 영국계 중고등학교, St. Marys School,에 재학하면서 영어실력향상을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할 때이었다.
23-4. 급성 요통, Sciatica, 발병.
Dodoma 주에서 한 Field Work은 원만히 끝났음으로 Dar es Salaam에 나와서 휴양하면서 다음 임지에 대한 발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이었다. 그런데 신상에 병고가 생긴 것이다. 즉, 요통이 심하게 되어서 조심 휴양하였음에도 아랑곳없이 병석에 눕고 말았다. Field Work로 매일 같이 길도 없는 Bush속을 Land Rover로 출장 다닐 때 받은 충격으로 허리의 Disc가 탈출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Dar es Salaam시내에 있는 Agakhan Hospital에 부축을 받으면서 입원하였다. 그 곳의 외과의, 인도인, 진단으로는 역시 예측 한 대로 Acute Lumbago and Sciatica 이었다. 이 급작스러운 입원을 하던 날은 공교롭게도 Brazaville/Congo, WHO/AFRO, 의 회의에 참석차 출발할 날 이었기도 하였으나 부득이 취소한 것이다. 40여일 이나 입원하였으나 병세는 완강하더니 나중에는 Diathermy치료를 했더니 소강상태를 찾게 되어 퇴원하였다.
후치료 로는 Dar es Salaam해안에서 해수욕을 즐기면서 건강을 회복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Field Work이 끝나고 휴양하다가 발병 한 것이 불행중 다행이었다.
24. Nigeria로 전근.
Dr. Roig, WR/Tanzania,를 가끔 만나서 나의 전근 정보를 듣자니 Botswana로 전근 될듯 싶다는 Brazaville/AFRO의 동향이라고 하였다. Botswana는 South Africa속에 있는 작은 나라이고 토후국인데 기후가 좋고 단일민족이라고 한다. 전근처로는 가볼만한 곳으로 여겨저서 문헌상으로 그 곳 민정에 대한 공부도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실제 발령을 받고 보니 Botswana가 아닌 Nigeria라는 것이다. Nigeria는 넓은 영토에 다수민족이 연합한 구 영국식민지이고 기후는 열대이며 군벌에 의한 정권 쟁탈이 잦고 corruption이 심한 곳이라고 알게 되었다. 다소간 실망도 하였으나 마침 년가 때이기도 하여 우선 년가여행을 끝내고 부임하기로 하였다.
24-1. Lagos로 부임.
년가는 우선 미국을 경유하여 한국을 거치는 행로를 택하였다. 미국에서는 Mt. Union College, Ohio,에 들려서 그 학교 Dean, Dr. Morgan을 만났고 셋째아들 Paul의 입학의뢰를 하였다. 3형제가 모두 큰형의 뒤를 이어 Mt. Union College로 진학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산업부흥이 각처에서 활발히 진행된다고 함에 지방여행으로, 예컨대, 울산비료 와 포항제철소를 견학하는 여행도 하였다. 년가가 끝나고 Nigeria로 부임하였는데 Lagos소재의 WR/Nigeria와 사무타협을 하니 나의 주둔 할 곳으로는 Kwara State의 Ilorin이라고 한다. Lagos에서 약 100 mile의 북쪽에 위치하여 중간에는 Nigeria의 제2의 도시 Ibadan을 경유하는 곳이라고 한다.
24-2. Ilorin에 정착.
때는 1971년 11월 말경이었다. Duty Station인 이곳 Ilorin은 정부기구개혁에 의하여 최근에 Kwara주청 소재지가 된 곳으로 가막사들이 주요건물 이었고 관사 배정도 늦게 되어 호텔에서 상당기간을 거처하기도 했다. Kwara주 보건부로 출두하니 Counter Part역활을 할 Dr. Adeoye, Nigeria인,과 만나게 되어 앞으로 할 Project에 대한 타협을 하였다. 즉, Project Title은 Development of Basic Health Services, Kwara State이며 나의 지위는 Public Health Advisor,Kwara State,라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참여할 주요 사업내용으로는, 보건행정기구 검토, 보건행정 정책수립과 집행, 보건행정 인원 훈련과 확보, 그리고 WHO/UN 원조사업인 UNICEF원조사업 등이 열거 됐다. 이상과 같은 Plan of Work으로 나의 Public Health Advisor로서의 역할은 1974년 5월까지 계속된 것이다.
나의 만 60세 은퇴시기에 마감한 것이다.
Assignment Report; Development of Basic Health Services, Kwara State, Nigeria는 WHO/AFRO에 제출하였다.
24-3. Malaria리환과 투병.
Ilorin에 거주하자니 열대기후인데다가 습기가 많으니 불쾌지수가 높은 곳이었다. 일몰 후에도 온도는 82도가 계속되니 구미는 감소하여 저녁식사를 하는 것도 큰 고역이었다. WHO집무규정에 의한 Prophilaxis Pills도 규칙적으로 복용하였으나 마침내는 두통과 발열 그리고 허탈감에 시달리는 발병을 한 것이다. 혈액검사를 하여보니 Malaria Plasmodium(+) 이었고 이 양성 결과는 2개월후에나 음성화하였다. East Africa에서는 7년이나 지냈는데도 무난하였는데 이곳 Nigeria에서는 Malaria에 걸린 것이다. 열대기후에 극성스러운 악성 모기에 물린 것이다. 그러나, 큰 후유증은 없이 완쾌했으니 천만 다행 이었다고 하겠다. Africa의 열대지방에 여행할 때는 각별한 주의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24-4. Ibadan의 한상기(韓相棋) 박사.
내가 Ilorin/Kwara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는 Nigeria에는 한국사람이라고는 수도 Lagos와 Ibadan에 각각 한 가정씩이 있었을 따름이었고 한국정부와는 외교관의 교환설치도 없을 때이었다. Lagos의 한 가정은 강경구씨라고 하는 분인데 K.O.T.R.A.의 파견원이고 Ibadan의 한 가정은 I.I.T.A.,International Institute of Tropical Agriculture,에 근무하는 한상기 박사 이었다. I.I.T.A.는 나의 근무처인 Ilorin과 수도 Lagos와의 중간 지점인지라 내가 공무 타합차 가끔 Lagos로 출장 갈 때는 들리기도 한 곳 이다. I.I.T.A는 Ford재단의 출자로 설립된 열대농산물 연구소로서 비영리기관 인데 그 규모가 대단한 곳이다. 즉, 광대한 기지에 자리잡고 최신식의 연구용 건물과 시설이 설치된 곳이다. 직원용 사택과 오락시설이 모두 잘 구비되어 있어 일단 이 기지에 들어서면 별천지와도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한 박사는 일찍이 수원농과대학을 거쳐서 Minnesota Plan에도 참여하여 수련을 받은 분으로서 열대농업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진 학자 였다. 따라서, 이 곳 I.I.T.A에서는 각별한 연구에 몰두하던 분으로 특히 Casaba, Nigeria사람들의 주식 임,에 대한 종자 개량 과 그 증산에 크게 이바지 한 분이다. Nigeria정부에서도 크게 감사하고 표창도 하였다고 한다.
한 박사는 내가 정년퇴직으로 Nigeria를 떠난 후에도 계속 연구에 몰두하면서 후배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이던 분이다. 마침내는 정년퇴직을 하였고 영주지로는 Ohio주를 택하여 그 곳에서 이미 정착하여 살고 있는 자녀들과도 가깝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24-5. 아이들, 3 남,의 면학 동정과 성취.
앞서도 적은 바와 같이 내가 Uganda로 떠날 때는 가족동반을 하였으므로 낯설고 물설은 외국 땅에서 적응하는데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하였다. 특히, 여기에 적고저 하는 것은 아이들, 3형제,의 학업계속과 그 성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다. 기후풍토가 다르고 언어풍속 그리고 민족이 다른 환경에서 생활하면서 공부를 계속한다는 것은 매우 힘이 드는 일이다.
우선, Chuck,장자,은 서울을 떠나기 전에 미국으로 유학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음으로 Uganda에는 가족과 동행하였다가 3개월만 같이 체재하고서는 그 해 가을 학기에 맞춰서 Europe경유로 미국에 갔으며 Ohio의 Mt. Union College에 진학 한 것이다. 나이도 19세로서 성장하였고 지각도 생겨서 공부에 열중할 때이었다. 따라서 미국유학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고 할 것이다. College를 마치고 1971년 6월에는 North Western Medical School로 진학하였다. 후속 조처로는 California로 옮겼고 Berkeley와 L. A.에서 Internship과 Residentship을 각각 이수하였고 Board시험도 2 가지, 즉, Pediatrics와 Immunology,에 통과하였으니 현재는 Immunologist로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John, 둘째,은 서울을 떠날 때는 경복고등학교에 입학만 하여 놓고 떠났으며, Paul,셋째,은 청운국민학교 4학년초에 떠났던 것이다. Uganda, Kampala에서 각각 그곳 국민학교와 고등학교에 전학하였다. 학교교육은 영어가 유통어이었음으로 매우 불편을 겪었고 학급도 일년씩 격하하여 취학 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WHO/AFRO직원으로 취직하면서 주거를 Tanzania로 옮기게 됨에 있어서는 John과 Paul은 학교를 Nairobi, Kenya소재의 St. Mary School, 영국 계통의 Mission School임,로 전학하였고 형제는 같이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역시 영어 실력의 태반 부족으로 많은 곤욕을 치렀다고 아는데 St. Mary School은 영국 Scotland계통의 Mission School로서 매우 엄격한 학생 훈련을 하는 곳이었으므로 형제가 이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진학하는데는 많은 혜택도 받은 것으로 안다. 영어 발음도 Scottish 영어를 구사하게 되어서 미국에 와서는 당분간 시간이 걸려서 미국영어로 돌아섰다고도 한다. 미국 유학은 John과 Paul이 모두 Mt. Union College로 진학하였으니 큰형 Chuck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것이다. College공부가 끝나고 John은 Michigan State University의 Chemistry Course로 PhD를 받았으며 Paul은 Berkeley, UC,의 Electrical Engineering Course를 마쳤다.
이와 같이 하여 3 형제는 모두 미국에서 대학공부를 마치고 U. S. Citizenship도 받게 되었다. 3 형제들의 Citizenship은 내가 1973년에 Green Card를 받고 미국시민으로 등록이 된데 계속하는 가족이민 으로서 성립을 본 것이다. 벌써 1/4세기가 지났고 한국사람으로서 미국 이민한 예로는 초기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아이들의 면학한 동정과 성취한 것을 약술하였는데, 내자, 안사람, 의 해외 생활은 고독의 연속이었다고 여겨진다. 체질이 비행기여행에 몹시 약해서 년가 때의 장거리 여행에는 매우 고생도 하였다. 신약하여 1978년 봄에는 마침내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3 남의 학업 성취후의 사회 진출 하는것을 보지도 못한 것이다. 항상 먼저 간 고인의 명복을 빈다.
25. L. A.에서 은퇴하고 영주하다.
Nigeria에서 정년 은퇴하고는 미국으로 이민수속을 하였다. 영주할 곳으로는 L. A의 Palos Verdes Peninsula소재의 Estate를 선택하였다. 이 Estate에 구입한 단독주택은 해변 가에 위치하였고 기후는 매우 쾌적한 곳이었다. 뒷마당에는 Pool시설도 있어서 휴식함에 편리하였으며 Africa열대지방에서 고생하든 것에 비교하면은 참으로 소생하는 듯 한 기분이었다. 신혼한 Chuck과도 동거하였고 새며느리와 낯도 익힌 것이다. 나는 독서하기와 운동으로는 근처의 Golf Course를 돌기도 하였다.
25-1. Real Estate Agent License취득 과 Community Life에 동화.
미국 내에서 의료업에 종사 하고저 함에는 M. D.학위와 Board합격증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는 한국 M. D.자격임으로 의료업자로 행세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내 나이 60세로 WHO/UN직장을 은퇴한 입장인지라 새삼 미국의 의과대학공부를 재수 할 수도 없으니 주류사회에 동화하기 위하여서는 의료방면 보다는 부동산을 취급하는 방면으로 직장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우선 Real Estate Agent License의 획득이 필요함으로 응시차 자습공부를 시작하였고 동시에 Adult Education School에서의 수강도 겸하였다. 자격시험 통과까지는 1년의 시일이 걸렸다. 내가 받은 Real Estate Agent License는 한국사람으로서는 극히 드문 존재이었고 불과 수명정도의 면허 소지자가 있었다고 안다. 이와 같이 면허를 가지게 되었음으로 부동산 소개업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P. V. E.를 중심으로 하고 인근 몇몇 시에도 활동 범위를 넓혔다. 약 1년간을 종사 하여보니 수십 호의 가옥매매에 참여하였고 내가 현재 살고 있는 Torrance의 가옥도 그때 Country Hills에 신축한 가옥중의 한 채를 구입 한 것이다. 벌써 1/4세기가 넘게 살고 있으며 필생의 거처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동산 거간업도 경험 하여보니 동업자, 백인들, 간에 이해관계로 경합이 심하고 심지어는 인종차별로도 변하는 기색을 느끼게 하였다.
마침, 이때이었다, 즉, California Medical Board에서는 Acupuncture에 대한 Licensing을 시도하고 있었다. 매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평상시에도 기맥론(氣脈論)에 근거하는 침구술(鍼灸術)은 심오한 동양철학에 근거한다고 여기고 있어 연구 대상이었음으로 흔연히 주 보건당국의 면허 행정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때는 1976년이었다.
25-2. California L.Acs.(鍼灸免許)획득.
China Town을 중심으로 하는 Herb(藥用植物)의 판매와 동양의학에 의한 민간요법은 성행 중이었으나 보건당국으로 부터는 하등의 취체대상이 아니었고 그저 Herb는 Supplementary Food이고 진료행위는 Alternative Medical Practice, 즉, 민간요법행위라고 만 여기고 묵인하여 오던 참 이었다. Korea Town에도 이민인구가 증가함에 소위 한방원과 건재약국이 증가하게 되었는데 China Town이나 마찬가지로 당국에서는 묵인하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던 중 Acupuncture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진전되면서 부터는 이 민간요법은 California Medical Board에서도 Alternative Medicine으로 각광을 받고 조장행정의 대상이 된 것이다. 즉, 면허행정의 필요성과 교육기관의 육성필요성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보건행정조처로서는 입법조처로서 Acupuncture Law를 상정 발표하였고 면허행정도 하게 되어서 Certified Acupuncturist를 처음으로 인가 한 것이다. 이 면허발행때에는 기존의 의료업자가 상당수 영업 중에 있었음으로 이들에 대한 면허는 Grand Father Clause를 적용하여 그 분들의 기왕의 경력을 면허조건으로 참작하기도 한 것이다. 나의 면허는 #151로 받게 되었는데 과거의 의료인 으로서의 경력을 참작한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현재의 면허칭호는 Certified가 아닌 Licensed Acupuncturist로 일 단계 상승시킨 지위에 있다. 장차는 교육과정이 연장되고 M. D. Course와도 흡사하게 되면 Dr. of Acupuncture의 칭호를 갖게 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다.
25-2-1. 가주침구법 상정 과 Lobby 활동.
California주 의회를 통과한 Acupuncture Law가 성립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그 입법안의 상정과 그때 Lobby활동한 Episode의 대략을 적어 보기로 한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China Town 이나 Korea Town에는 이미 상당수의 동양의학업종의 관련자들이 있었음으로 그들 업자들의 관심은 매우 날카로워 진 것이다. 따라서 보건당국에서 하게될 침구면허행정을 위하여서는 자기네들의 이해관계를 반영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업자들의 단결을 보게된 것이다. 한국인업자들도 회동하게 되었고 중국인 단체와도 보조를 맞춘 것이다. 나는 자주 Korea Town에서 모이는 한국인업자와 동조하게 되었고 California주 의회에도 대표로 출석하여 그곳 청문회에서 Lobby활동을 하였다. 가주 침구법성립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자부한다.
25-2-2. Grand Father Clause조문 삽입과 면허 받음.
침구법과 주의회청문회에서는 기득권설정에 대한 논란이 특기할만한 내용이었다. 즉, 이미 영업 중에 있는 업자들에 대한 면허교부 문제이다. 업자경력으로 5년 이란 기간을 설정 한겄이다. 반면에 년한 미달의 신규신청자는 법이 규정한 수학 과 실제훈련을 받도록 규정 한 것이다.
다시말하며는 5년 이상의 유경험자는 Grand Father Clause에 의하여 면허를 교부하도록 하였고 못 미치는 사람은 교육기관을 통하도록 한 것이다.
새로 입법함에 있어서 유경험자의 자격을 면허규정의 조건으로 채택한 것은 구제규정이라는 입법정신에 잘 부합시킨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 침구법의 불미스러운 규정으로는 침구사의 신환 취급을 M. D.전문의 진단하에서만 하도록 한 것이다. 다행히도 이 무리모순은 법 시행후 만 1년후에는 개정철폐 되었고 오늘날의 침구사 초진은 독립적으로 할 수 있게 된겄이다. 이와 같은 곡절로 침구법의 발효는 1976년 11월 Brown지사의 서명날인으로 공포를 본 것이다.
나의 침구업 진료개시는 면허 받은 다음에도 1년이상 지체하였다. 즉, M. D. 전문의 진단조항에 불복 한 것이다. 그러다가 그 조항이 삭제되니 1978년에 들어서면서는 개업하게 되었으며 내가 살고 있는 Torrance시내에서 진료를 계속 하였다. UN Retiree의 Hobby삼은 업체라고 자처도 한다.
25-3. South Bay Acupuncturists' Association결성과 Seminar운영.
진료생활을 하면서 침구에 대한 공부, 즉, 14 경락(經絡)원리에 대한 진리탐구와 작금은 많이 발전한 Alternative Medicine에 대한 지견(知見) 발전과 맞물리니 동업자간의 정기적인 모임으로 Seminar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N. I. H.의 종래의 주장이던 'Acupuncture Needle is an Experimental'이라고 하던 용어는 'Needle is a Surgical Instrument'이라고 개칭하였고, F. D. A.가 주장하던 ' Herb is a Supplemental Food'이라는 용어는 'Herb is a Remedy'라고 개칭하게 되었으니 괄목할만한 과학적 뒷받침을 갖게 되었다고 하고 침구 업의 동료들은 용기를 내어 매달 한번씩 정기적으로 만나자고 한 것이다.
그 취지 요행으로는;
1). Seminar의 명칭은 South Bay Acupuncturists' Association이라고 한다.
2). 침구면허 소지자로서 회원이 되고 상호 친선을 도모한다.
3). 침구에 대한 학술 탐구와 환자진료의 경험을 상호 교환한다.
4). 침구법에 관한 법규 준수와 Acupuncture Board와 긴밀한 연락을 도모한다
5). Acupuncture Board가 요구하는 Reeducation Program인 학술 Seminar 에 동조한다.
이상과 같은 운영방침에 의한 Seminar는 이미 20 여년에 걸쳐서 계속 되었고 금년 3월 현재 #165회에 이르고 있다.
나는 최근까지 S. B. A. A.의 회장역활을 하다가 후진에게 책임을 넘겼고 현재는 고문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간에는 회원동료들로부터 감사패, Plaque, 3개를 받은 바 있다.
25-2-4. Acupuncture College증설과 L. Acs.의 증가.
침구법의 공포와 면허발부가 계속되면서 침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향상, 즉, Needle은 Experimental이 아니고 Surgical Instrument이고 Herb는 Food가 아닌 Remedy라고 하는 과학적 연구의 뒷받침, 이라는 인식이 널리 알려지니 신규면허 취득의 희망자가 많아져서 여기에 맞물리는 교육기관, Acupuncture College의 증설을 보게 된겄이다. California 주에서는 물론이고 미국 내 여러 주에서도 교육기관이 설립되는가하면 면허행정도 뒤따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침구업자는 증가 일로에 있으며 작금에 이르러서는 가주 내에 6,000여명의 L.Acs를 셈 할 수가 있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 중의 반 이상은 백인이고 동양사람 계통에는 중국인이 첫째로 많고 그 다음은 한국인이 차지한다고 한다. 이 한국인은 현재 600여명이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내가 개업하든 1978년에는 불과 수명만이 Torrance 시내에서 개업하고 있었는데 작금에는 그 수(數)도 60여개소로 늘어 난 것이다. 앞으로는 계속 교육수준이 향상되고 업자의 자질향상도 꾸준히 계속되면은 L.Acs.의 지위향상은 멀지 않은 장래에 O. M. D.(Oriental Medical Doctor)로 개칭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현재의 Acupuncture Board는 Medical Board와 대등하는 의료업자 지도기관 이 될 것이다.
26. 상처와 재취.
인명은 재천(人命在天)이라고 하였으나 상배(喪配)를 당하고 나니 인생의 허무감(人生虛無感)을 금할 수가 없었다. 60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단명 한 것이다. 10여년의 Africa생활에는 많은 무리가 심신(心身)양면에 작용하였을 것이다. 즉, 낯설고 물설은 곳에서 항상 고독하였고 기후풍토에 적응이 또한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정년퇴직 하든 Nigeria에서부터 건강에 이상을 느꼈었고 미국으로 이민하여온 후부터는 더욱 쇠약 하는 증세가 나타났다. 전후 3년여의 투병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난치병인 뇌종양(前頭葉腦腫瘍)이라고 판단이 났다. 참으로 놀랍기만 했다. San Pedro에 있는 Green Hills Garden에서 영민 한다. 나는 실심하고 독수공방 하였는데 그후 2년이 지난 다음에는 인연이 있어 중매를 받어 재혼하니 새로운 인생출발을 기도 한 것이다. 즉, 나는 64세이고 그녀는 56세 이었다. 동고동락중인데 세월이 유수라드니 벌써 2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요즈음은 피차 로년은퇴의 생애를 보내고 있는데 큰 병은 없이 지내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여긴다.
27. 여가에 여행하고 관광을 즐긴다.
자유업인 침구원을 운영하고 있으니 시간이용에 신축성도 생겼다. 이곳 L. A.에서 영주하는데 일상생활의 태반은 은퇴생활을 즐기게 되었음으로 거의 매년 한두 번씩의 여행과 관광을 즐기게 되었다. 미국 내는 물론이고 해외에도 나들이하게 된 것이다. WHO/UN직원으로 재직할 적에는 용무출장과 년가이용으로 장거리여행을 한바 있고 지구를 5회나 돌아본 경험도 있지만 직무관계이었음으로 관광과는 거리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적고자 하는 여행기록은 편의상 두 가지로 나누어 볼가 한다.
27-1. 재직시대.
이미 앞에서도 적은바와 같이 직무관계로 들렀던 지역과 장소 그리고 그때의 시일 등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27-1-1.
1952: Saigon/Vietnam;
WHO/Western Pacific Regional Conference 에 한국대표로 참석함.
부산발 Hong Kong경유 왕복.
27-1-2.
1966-1974:
Uganda행, Kampala, Mbarara, Jinja에 들르다.
서울발 Hong Kong, Bombai, Aden, Nairobi경유.
Tanzania행, Dar es Salaam, Morogoro, Dodoma에 들르다.
서울발 Hong Kong, Cairo경유.
Brazaville/Congo; WHO/AFRO의 Regional Office소재지에서 회의참석과 이,취임때도 내왕함.
Geneva/Swiss내왕:WHO/AFRO에 이,취임할때와 Project의 Fieldwork 에 대한 기술지도 받기위한 내왕.
Khartoum/Sudan내왕: Trachoma Campaign Field Work시찰차 내왕함.
년가여행: 년가는 2개월씩인데 임지를 떠나면 미국에서 1개월을 쉬다가 다음에는 서울에 가서 1개월을 더 쉬고는 임지로 돌아간다.
WHO/AFRO재임시 모두 5회에 걸친 년가여행을 하였다. 이 년가여행의 행로는 임지를 떠나서 미국으로 먼저 떠날 때는 Rome, London등을 경유하고 New York에서 Ohio주의 Mt. Union College, 아들들의 유학하든 곳, 에 들르고 California에서는 Monterey를 거쳐서 San Francisco에서 태평양횡단을 하고 서울에 들어간다. 그리고 임지로 돌아갈 때는 서울을 떠나면은 Hong Kong을 경유하였고 그 다음에는 Bombay, Cairo, Nairobi를 거쳐서 Dar es Salaam에 도착하는 순서이었다.
27-2. 미국에 이민하고 정착한 시대.
침구업에 종사하면서 자유시간을 이용할 수가 있게 되니 매년 한번 혹은 두번씩의 여행을 하였는데 단독 또는 단체여행을 하였다. 여행은 절대로 사치나 한가한 사람들만 즐기는 낭비가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다음은 그 지역과 장소 그리고 그때의 시일 등을 적기로 한다.
27-2-1. 미국내 여행.
1957-7: California Sierra Nevada를 중간에 두고 순회하는 승용차 여행;
일행 4명이 Monterey를 떠나서 S. F., Lake Tahoe, Reno, Las Vegas, L. A. 그리고 Reedley를 경유하고 돌아 왔다.
1975-1985: 자가용차에 의한 California주내 국립공원 유람;
Grand Canyon, Yosemite, Yellowstone등지에 2-3차씩 여행하였고 Sequoia Nat'l Park과 Kings Canyon도 유람하였다.
1979-8: 미대륙횡단;
내가 운전하면서 내외가 같이 남방행로인 Arizona, New Mexico, Texas, Louisiana, Florida, Georgia, South& North Carolina, Virginia, Washington, D. C., New York에 도착하였고 돌아오는 길은 북방도로인 Pennsylvania, Ohio, Indiana, Illinois, Minnesota, North Dakota, Wyoming, Utah, Nevada를 거치는 대장정을 완주하였다.
1988-5: Reno와 Lake Tahoe내왕;
Lake Tahoe에는 두 번째 여행이었다. 지난 1957년 첫 번째 여행 때와는 천연경관이 많이 손상되어 있음을 보게되니 놀랐고 애석하게 생각도 하였다. 즉, 호숫가 일부에는 Casino가 들어섰으며 천연 원시림도 손상되어 있음을 보았다.
(1990-3) Death Valley답사; 죽음의 사막이라고 함에 겁도 먹고 갔는데 막상 가서 보니 견딜 만 하였고 세계에서 최저라는 Desert호(湖)에도 들러 보았다
(1990-5) Canyon Caper Trip; Grand Canyon Nat' l Park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Canyon Park들인데 그 중에서도 Zion Nat' l Park과 Petrified Forest를 본 것은 기억에 남는다.
기타: 학사관계(學事關係)로 방문한곳은 Yale대학, Massachusetts주내의 Exeta School과 Williams School등에 내왕하였고, Washington, D. C.에는 여러 차례를 들르면서 그곳 일대의 명승지와 시내의 미국회 의사당, 박물관, 백악관 등도 참관하였다.
27-2-2. 미국 외의 여행.
주로 단체여행에 참가하였다. Guide가 동행하고 여정도 짜임새 있게 되어 있는 등 편리한 까닭이다. 그러나, 학회출석이나 일본열도 순회여행에는 단독 또는 가족과 같이 내왕하였다.
1975-10: 한국방문과 지방 발전상 시찰;
재미 실업인 단의 모국 산업시찰단에 참가 내왕하였다.
1975-11: 중공 내왕, 제1차;
모택동 정권 하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관광객의 입국을 허용 할 때 이었다. 홍콩경유 광동을 통하는 길만이 외국인 관광객을 통과시키는 유일한 길이었을 때이었다. 재미중국인 침구업자의 중국방문단에 참가 한 것이다. 경유지로는 서울, 대북, 홍콩 그리고 북경, 신강성의 Ulumqi, Silk Road의 Oasis등을 보았고 만리장성의 낡은 모습도 보았다.
1979-8: 중공 내왕, 제2차;
북경에서 개최한 국제침구학회에 참석하였고 북경일대의 관광도 하였다.
1993-9: 중공 내왕, 제3차;
북경에서 개최한 국제침구학회에 참석하였고 기공(氣功)실연 하는 것도 처음으로 보았다.
1998-6: 중공 내왕, 제4차,
Group Tour에 Chuck내외와 같이 참가하였다. 상해에서 유람선을 타고 한구(漢口)상류의 삼협지대(三峽地帶)를 거쳐서 중경, 서안, 북경을 거쳐서 상해로 돌아왔다. 중공내왕을 거듭하면서 보게된 중국의 도시발전은 실로 괄목 할만한 것이었고 관광명소에 대한 시설 개비도 놀랍게 보았다. 중국사람 남녀들의 복장도 많이 달라졌고 서구화 경향이 역력하였다. 앞날의 중국발전은 주목하여야 할 것이라고 보고 돌아 왔다.
1982-5: 일본 여행;
Tokyo에서 개최한 재미침구사 학습회에 동참하였다.
Kyoto교외에 신설 개교한 침구대학도 참관하였는데 6년제 대학으로서 철저한 과학적 침구교육을 실시하는 정규대학이라고 알게 되었다.
1982-7: Hawaii, Maui관광;
Hawaii와는 다르게 Maui관광은 순전한 관광지로 발전한 조용한 곳이었다. 시설도 좋았다. 섬속의 사화산 분화구에도 Rent Car로 내왕하였다.
1984-12: 서울 왕복;
오래간만에 추운 겨을을 당하고 보니 방한복과 방한화를 사서 사용하다가 돌아 온 기억이다.
1984-8: Australia와 New Zealand관광;
은퇴한 AFICS/Association of Former International Civil Servant직원의 Group Tour에 참가한 것이다. New York과 L. A.시발로 Australia와 New Zealand를 거쳐서 태평양상의 Fiji 섬과 Tahiti섬에 들렀다가 Hawaii경유로 L. A.에 돌아 왔다.
Sydney 시 와 그 항내에 설치한 유명한 Symphony Orchestra공연장은 관광객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였고 Sydney항만 일대의 주택지대는 마치 그 모두가 별장지대인것만도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가가호호 마다 자가용 Yacht가 계류되어 있는 등 마치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듯 한 인상도 받았다. 수도 Canberra는 계획적으로 건설한 곳으로서 수교하는 각국의 공관건물은 모두 그 나라의 특색을 살린 건물양식으로 건축되어 있는 등 매우 인상적인 곳으로 보았다.
New Zealand는 Australia와는 생활양식이 판이한 곳이다. 그 남북의 두 섬은 전부 비단결 같은 목초로 뒤덮여있고 군데군데에는 백양 떼가 한가로이 목초를 뜯고 있었다. 인구수의 배가 넘는 백양 떼라고 한다. 어딘가 길을 가다보니 노변에는 양몰이 하던 충견(忠犬)의 동상도 건립되어 있는 것을 보게되니 이 나라는 목장과 양떼의 별천지이구나! 하고 새삼 느끼기도 한 기억이다. 남도(南島)의 남단에는 연중 호우가 내리어 그곳 Fjord절벽에는 무수한 폭포수가 걸려있으니 바로 선경에 들어 온 듯한 감상이었다. Hotel시설도 좋고 하니 신혼부부가 찾아온다며는 매우 Romantic한 감상을 간직하고 돌아갈 곳으로도 보았다.
1985-9: 한국방문 내왕;
L. A.교포 노인회 모국방문단에 동참하였다. 여러 곳에 들러서 발전하는 한국의 실태를 보게되니 일행은 모두 감탄하고 만족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1986-4: Vancouver Expo;
Canada에서 Vancouver는 기후 좋고 산업발전의 중추역활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중국과 홍콩과의 사이에 밀접한 이해관게가 있다고 하며 Expo에서도 그러한 관계가 잘 반영되어 있는 듯이 보였다.
1986-5: Asian Olympic Game;
매 4년마다 개최되는데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경기대회가 끝나면 2년후에는 Olympic Game이 개최된다고 하면서 많은 신경을 쓰는 듯 싶었다. 보아하니 거창한 Main Stadium의 건설이며 Olympic공원을 조성하는 등 한국의 국력발전을 과시하는 듯도 싶었다.
1986-10: 일본열도 순회 여행;
Japan Rail Pass를 미리 준비하고 이용 한 것이다. 우선 서울에 갔다가 부산으로 내려가서 관부 연락선에 올랐다. 처음 타보는 연락선이었다. 재일 교포들이 승객의 대부분 이었다. 시모노세끼(下關)에서는 신깐센(新幹線) 소위 '탄환열차'(彈丸列車)에 탑승하였고 Osaka(大坂), Nagoya(名古屋), Tokyo(東京), Sendai(仙臺), Aomori(靑森)에 도착하였다가 아오모리 에서는 연락선에 옮겨 타고서 북해도 걼뽀로(Sapporo)시로 향하는 여정을 밟았다. 나는 일제 시대 때도 못가보든 일본 열도를 횡단한 셈이다. 걼뽀로 시는 보아하니 소문에 듣던 대로 서구화한 도시이었고 그 교외에 위치한 국제 Olympic규모의 Ski장에도 들려 보았다. 이곳 걼뽀로 시에서는 행로를 되돌아 섰고 다시 일본열도를 횡단하면서 큐슈(九州)지방으로 갔다. 후꾸오가(福岡)시를 거처서 구마모도(熊本)시 까지 내려갔다가 반전하였다. Rail Pass를 이용하니 좌석이 침대차에 항상 이용되었고 승무원은 매우 친절하기도 하였다. 다시 관부연락선의 침대 칸을 이용하여 부산으로 돌아 온 것이다. 내가 소원하든 일본 열도 횡단여행을 무사히 끝마친 것이다.
1987-5: Mexico Trip;
Mexico 시에 와서 보니 시내건물은 수년 전에 겪었다는 대지진때 받은 피해흔적이 여기저기에서 산견 되었다. 고층건물의 유리창이 깨어진 채로 남아 있는 것을 쳐다보니 놀랍기도 하였다. 인구는 1천만명이 넘는다고 하니 세계에서 최대도시라고 한다. Smog로 시내 공기는 매우 혼탁함을 보았다. 정치행정면 그리고 재정경제권은 거의 순혈 Spain Latino가 장악하고 있는 듯 싶었고 그들의 용모와 단정한 옷차림은 California에서 흔히 보는 Latino-Mexican과는 매우 다른 존재라고 보았다. 호화로운 부촌이 있는가하면 격리된 빈민촌이 있는 등 빈부의 차가 심한 곳으로 인상 받았다. 일시는 I.M.F.의 통제도 받았다고 하니 경제대국 미국의 인접국으로서는 특히 그 경제정책에 많은 관심이 필요할 것이라고 보았다. Mexico대학의 재학생수는 30만 명이라고도 한다. 도무지 납득이 안 간다.
1990-6: Alaska Ocean Cruise;
Vancouver시를 떠난 호화유람선관광은 천연림이 울창한 다도해협을 굽이굽이 돌아서 Alaska주의 수도 Juneau에 들렀다가는 Glacier Bay Tour를 finale로 끝난다. 억만년이 묵은 빙산이 녹아서 Bay속으로 떨어지면은 굉장한 폭음과 더불어 부서지고 빙괴는 바다위로 표류하는 것이다. 해안에는 북극 생의 흰곰이 살고 있으며 근처에는 무수한 조류가 지저귀고 있는 곳이다. 이 지방에는 원래가 Russia영토이었음으로 건물이나 풍속습관에 Russia영향의 잔재를 볼 수가 있었다. Salmon Fishing에 참여하였다가 허행한 것을 아쉽게 여긴다.
1991-6: 한국 왕복;
서울의 Lotte Hotel에 투숙하였고 약 2주일간을 지체하였다. 시내관광과 대전 왕복도 하였다. 시내 청담동에는 내가 소유하든 Apartment 가 있었는데 매각 처분하였다.
1991-7: New Haven Area의 단풍 관광;
Torrance Senior Citizen이 주선하는 group tour에 참여하였다. Canada측에서 관상하는 Niagara Falls를 관광하니 여러해 전에 U. S.측에서 관상하던 것과는 매우 다르게 바라보았다. 다음은 New Haven방면을 순회하면서 때마침 절정기에 있는 단풍구경을 잘 할 수가 있었다. L. A.근방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관이었다.
1991-8: Budapest/Hungary에서 학회를 참관하다;
Immunology에 대한 학술강연회이다. 아들, Chuck, Immunologist,과 동행하였다. 학회등록장에는 세계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참집한 것을 보았다. 일본에서 많은 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국에서는 극히 소수만이 참석한 것을 보았다. 나는 학회가 계속되는 동안 틈을 타서 인접국인 Czechoslovakia, Austria 그리고 Germany 의 3국으로 기차여행을 하였다. 처음 들러보는 Vienna에서는 그들이 자랑하는 예술의 전당들을 돌아보았다. Berlin에 들러서는 시가지구경과 박물관에 들렀다. 매우 규모가 큰 박물관임에 압도당한 기분이었다. Budapest로 돌아오는 길은 기차여행을 하면서 3나라의 지방풍경을 전망하였다. 침대차에 타고 있자니 Austria를 지나가는데 그곳 지방사람 한가족이 한 칸에 같이 자리잡게 되었다. 점심때가 되니 그 가족들은 지참한 점심을 펴놓고 먹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들의 음식의 cheese냄새가 어찌나 지독한지 코를 찌르는데 견디기가 어려웠던 기억도 난다. Hungary를 지나면서 농촌풍경과 농사짓는 모습을 전망하니 그 농법은 매우 낙후한 것으로 인상 받기도 하였다. Budapest Hotel에서는 투숙객의 Passport를 보관명목으로 강제로 보관 하니 불쾌한 인상도 받았다. 출국한다고 그 여권을 찾아 가지고 비행장에 나가니 Frankfurt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1993-5: Europe과 Scandinavian Country Cruise Trip;
AAA, Auto Club,을 통하여 London을 시발하는 group tour에 참여 한 것이다. 쾌속정, Hovercraft, 으로 English Channel을 건너서 Belgium에 들어갔다. Tour Course로는 Rhine River, Berlin, Warsaw, Moscow, Leningrad, Finland, Sweden, Denmark을 경유하여 London에 돌아오는 여행으로 끝이 난다. 이상 여러 나라를 한바퀴 돌고 난 다음 받은 인상을 열거하면은 다음과 갔다.
동독을 위시하여 Poland, Russia는 모두 낙후된 사회임을 역력히 알게 하는데 이 까닭은 공산주의라는 체제가 자유를 억제하는 까닭이라고 알게 한다. 즉, 도로시설이 형편없고 공공시설이 또한 보잘것이 없다. 물자는 품귀하고 조악하며 식당에는 음료 얼음물이라든가 Napkin Paper 같은 것이 품귀하고 제한 공급되는 등 상상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국경을 통과하는데도 Poland나 Russia국경에서는 보통 2-3시간씩이나 관광Bus를 정차 지체시키는 등 불편이 막심하다. 그런가하면 일단 공산권을 벗어나면, 예컨대 Leningrad에서 Finland로 입국하면 하등의 지체현상이 없어진다. Finland측 국경상점에는 물품이 풍부다양하고 친절하고 자유롭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사회와 공산 전체주의 국가가 얼마나 판이한 세상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지를 누구나 한번 체험하기 위하여서라도 꼭 한번 공산주의 국가에 가서 체험하여 보라고 권고하고 싶다.
1993-8: 대전 Expo 관광과 홍도(紅島) 관광;
한국의 산업발전상을 널리 홍보하고자 많은 정성과 노력이 경주된 박람회라고 인상 받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도 인접한 장소이고 하니 그곳은 앞날 많은 발전을 하게 되리라고도 여겨졌다. 1986년에는 Vancouver Expo구경도 한 기억이 있고 하여 대조적이기도 하였다. Expo를 관람하고는 흑산도 여행을 하였다. 한 반도 최서 단이기도 한 흑산도 일부에는 홍도란 곳이 관광명소로 손꼽힌다고 한다. 가서 관람하니 문자 그대로 기암절벽이 모두 홍색 일변도이다. 앞으로 Hovercraft같은 고속정도 도입하고 관광용 시설도 구비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1993-11: 일본 교또(京都)에서 개최한 국제침구학술대회에 참석;
동양 3국에서 교대로 개최하는 침구학술대회 이다. 교또시 교외에 위치한 Convention Center에서 개최되었는데 많은 학자와 방청객이 참석하였고 Europe의 ꅸꅸ나라에서도 참석하는 등 매우 성황을 이룬 학회이었다. 한국에서온 경희대학의 한의과대학교수 강교수가 기조연설 하는 것도 참관하였다.
1994-9: Brazil Group Tour;
Radio Korea가 주최하는 group tour에 동참하였다. Sao Paulo 까지 장시간 비행으로 피로하였는데 Hotel의 방 예약이 제대로 되어 있지않는등 휴식도 못하고 시내관광을 하자니 별로 호감 못 가진 여행이었다. Rio de Janeiro로 이동하니 소문대로 세계 3대 미항(美港)이란 명칭과 같이 인상적인 해변구경을 하게 되었다. 해변 백사장 일대에는 일류 호텔이 즐비하고 그 앞길은 Mosaic Promenade가 끝도 없이 전개되고 있었다. 실로 장관이라고 보았다.
기암절벽으로 소문난 Corcovado산정, 709 meter, 에는 cable car로 등정하였는데 Christ의 입상이 38 meter 의 높이로 용립되어 있고 수많은 참관객으로 붐비고 있음도 보았다. 이미 서산에서는 해가 지고 있을 때인데도 주위사방이 잘 조망되었고 그림과도 같은 경치는 참으로 명소임에 손색이 없는 곳이라고 깊은 인상을 받고는 다시 cable car로 하산하였다.
다음 행로로는 Iguasu Falls를 심방차 떠났다. 비행기편으로 기착한 곳은 3나라의 국경선이 접하는 곳 즉, Brazil, Argentina와 Paraguay 국경에 걸쳐 있는데 크고 작은 폭포수가 280개나 걸려 있다고 한다. 폭은 5km나 된다고 한다. 과연 세계 제일의 폭포수란 찬사를 받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1995-5: Europe Group Tour;
Radio Korea가 주최하는 group tour 이다.
Highlight로는 Dover Channel를 영불간 고속철도에 의하여 통과하며 Italy에서는 Pompei폐허 탐험도 한다기에 기대에 부풀어서 참가하였다. Europe에는 이미 여러 차례 여행한바 있음으로 관심은 주로 해저 Tunnel통과에 더 집중 한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London시발의 급행열차에 몸을 싣고 긴장하면서 Tunnel을 통과 하여보니 하등의 신기하다는 감각도 못 느끼는 사이에 기차는 해저를 통과하였고 야경의 Paris로 질주하는 것이었다. 이것 '별 것 아니구나!' 하는 허탈감 이었다. 동행하든 동료들의 동정도 보아하니 아무도 별다른 표정을 안 보였다.
여하간에 나는 내 생전에 Dover해협을 해저 Tunnel기차로 횡단하였다는 자기만족을 느꼈든 것이다. 계속 달리는 고속열차는 Mont Blanc산정을 지하로 통과하는데 나는 처음 경험으로 길이가 12 Km 나 되는 Mont Blanc Tunnel을 통과 한 것이다.
Italy의 Venice에 들렸는데 나는 두 번째의 관광 방문이었다. Ski Resort가 있는 Hotel Albatros에 투숙하였는데 이날은 5월 13일 이었고 나의 81세 생일이기도 하였다. 우리일행과 동행한 김동길씨의 강연을 경청한 다음 저녁 식사시간 때는 나의 생일 축하 건배를 동길 씨가 선도하였다. 고마웠다.
다음은 Milan과 Rome을 거쳤고 남부 Italy와 Napoli로 가면서는 그곳 생활양식을 보고서 놀라기도 하였다 북부 Italy와는 판이한 즉, 낙후된 생활양식을 보고서 놀라기도 하였다. Napoli에서부터는 Sorento, Pompei 를 경유하였는데 Pompei폐허에 들러보니 그저 인생이란 허무하기만 한 것이란 감상을 받기도 하였다. Sorento언덕길에서 내려다보이는 잔잔한 바다 물은 파란 ink색의 면경과도 같았으며 주위 일대의 Olive Grove와도 잘 어울리는 경관으로 인상깊게 전망하고서 돌아섰다.
1995-8: Canadian Rockies;
Vancouver에서 떠나는 group tour이다. Canadian Rockies를 보지 못하고 Colorado Rocky만 예찬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말도 있기에 결심하고 참가한 것이다. Alberta주의 고산지대를 Bus로 계속 달리면서 경치를 전망하자니 피로하기도 하였다. Canadian Rockies일대는 인구가 아주 희소한 곳이고 천연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보았다. 적설한 고산연봉이며 Ink를 풀어놓은 듯 한 곤색호수 등이 여러 곳에 있는데 억만년의 신비를 그대로 잘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보았다. Athabasca Glacier Falls는 3단계의 빙하폭포가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보았다. 돌아오는 길은 Vancouver에서 국경지대를 통과하는데 Canada에서 미국으로 밀입국하는 한국인에 대한 취체가 심하다는 것이다. 국경 세관에서 밤늦게 까지 많은 시간을 낭비 한 기억이다.
1996-3: 동남아시아 Group Tour;
Radio Korea가 주최하는 group tour이다. L. A. 출발로 서울경유, Hong Kong, 태국, Singapore, Indonesia등지를 관광하고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해산하는 course 이다. 동남아세아에는 많은 한국사람들이 관광을 하러간다고 듣기도 하였지만 막상 가서 보니 태국과 Indonesia 에서는 한국동포를 여러 곳에서 만났다. 관광 상품점에는 한국여인을 점원으로 고용하고 있는 곳도 보았다. 태국은 자고로 독립국가임을 자랑하는 나라인데 수도 Bangkok은 많은 건물들이 그 고유의 문화예술을 자랑하고 있으니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곳으로 보게 되었다. 교통도 매우 번잡한곳인데 지반이 약해서 지하도의 건설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육교 건설로 지상도로망을 대신하고 있으니 특이하게 보이는 교통망을 형성한 곳이다. 이 지상교통망은 일본자본에 의하여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Toll Gate 의 수입은 투자한 일본 자본 상환에 충당한다고도 한다. 빈틈없는 일본인의 상혼(商魂)침투라고 알기도 하였다.
Indonesia의 Bali섬에 들려보니 그 소문난 Bali Dance로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음을 보았다. Bali섬의 산정에는 활화산이 열기를 내뿜고 있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음으로 일행과 함께 내왕도 하였다.
태국여행에 불쾌하였던 것은 한국인 '땅꾼'이 진출 한 것을 보았을 때이었다. 즉, 한국인관광 상대로 Cobra쓸개, 뱀술을 현지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이다. Group Tour안내인한테 제발 그런 '땅꾼'한테는 안내하는 것 삼가서 하라고 간곡히 부탁도 하였다.
1999-3: 일본에 관광여행;
가족과 같이 열흘간 다녀 왔다. 즉, Boston의 Eric Family 4명, 내외 와 두 아이들,과 우리내외를 합하여 모두 6명이 3월 14일에 일본 나리다공항에서 합세하였다. Asakusa역 앞에 자리잡은 Star Hotel을 숙소로 하고 Tokyo일대와 아다미(熱海)온천지대 그리고 Kamakura를 구경하였고 Kyoto에 가서는 민박을 하면서 그곳 명소 순방을 하였다. 나는 이미 수차 일본을 출입하였으나 이번 여행에서는 처음으로 여러 곳의 관광명소를 보게 되었다. 즉, City Tour Group에 가담하여 메이지진구(明治神宮), 스미다가와(隅田川)와 boat cruise, 궁성(宮城), 긴자거리(銀座街里), 우에노공원 박물관(上野公園博物館)등을 두루 돌아보았다.
Kyoto에서는 Bus로 City Cruise를 하였고 헤이안진구(平安神宮), 기요미수데라(淸水寺), Kyoto박물관 등을, 그리고 도오지사(同志社) 대학 과 Kyoto대학 등에도 들러 보았다. Tokyo에 다시 돌아와서는 가마꾸라(鎌倉)여행을 하였고 그곳에서는 소위 소문난 하세대불(大佛)도 참관하였다. 하꼬네온천(箱根溫泉)에서 온천을 하고는 하꼬네Cruise 를 등산 Cable Car편으로 일순 하면서 관람하였다. 유황천이 여러 곳에서 분출하는 것을 보았으며 산정 관망대에서는 먼 곳에 용립하고 있는 후지산(富士山)의 흰 산봉우리도 관망 할 수 가 있었다.
이상에서 적은 바와 같이 이번의 일본여행에서는 소위 저명하다는 관광명소는 대체로 모두 잘 보았다고 생각한다.
27-2-3: Hong Kong 출입;
내가 해외에 출입 할 적마다 이곳 Hong Kong에는 으레히 들르고는 하였음으로 여러 가지로 인상 깊은 곳이다. 제일 첫 번째로 Hong Kong에 들른 것은 1952년 5월이다. WHO Regional Conference가 Saigon/Vietnam에서 개최됨에 한국대표로 출석 한 것이다. 당시 피난정부는 부산에서 집무할 때 였다. 내왕에 한번씩 들렀는데 Hong Kong시와 대안의 구룡시는 국제자유항으로 번영하는 곳으로 처음 들린 나의 안목으로는 문자 그대로 fabulous한 곳 으로 인상 받았다. 그후도 Hong Kong에는 해외로 출입 할 적마다 들르고는 하였는데 전후하여 모두 16회 나 들른 기록이다. 즉, Africa임지로 부임할 때와 년가때 내왕하면서 들른 것이 10회가 되고 관광과 국제회의에 참석할 때 들른 것이 6회가 된다. 무관세인 이 지역에는 세계적으로 유명상품이 이 집산 하는 곳임으로 나는 들를 때마다 생활용품을 구입하는데 분주하면서 수삼일간을 지체하곤 하였다. 즉, 의차류, 장신구, 신발, 전자제품등 일절의 필수품을 구입 한 것이다. 따라서 임지에서는 주로 식료품 구입만이 전부 이었다. 그간 세월이 많이 흘러간 요지음의 Hong Kong 에는 많은 한국인 관광객은 물론이고 교포재류인들도 많아졌지만 내가 처음 들르던 1952년과 1960년대에는 한국인 만나기는 극히 드문 때이었다. 많은 일본인들이 Europe등지에 상사나 관광으로 출입하면서 들르고는 하던 곳이다. 그러나 요지음은 한국사람들도 동남아시아관광 Boom을 타고 태국, Singapore 그리고 Indonesia등지에 출입하면서 Hong Kong에도 자주 들르게 된 것이다.
시대변천은 여차여차 하기도 하구나! 하고 나 혼자서 감탄도 한다.
글을 마치며.
내가 적은 회고록은 내가 지내온 이야기를 적은 것인데 일기장을 참작하면서 썼다. 내 나이 이미 86세인데 그 동안 겪어온 일들을 회고하여 보면 주마관등(走馬觀燈)하는 것과도 같다. 지내온 세월은 태평성세(泰平盛世)때에 태어나서 살다 간 사람들과는 달라서 많은 우여곡절(迂如曲節)을 겪었다고 할 것이다. 경험이란 매우 중요한 교훈을 동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에서 얻은 교훈은 글로 적어서 후손에 넘기면 그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참고가 되리라고 믿는다. 이러한 취지에서 나는 회고록(回顧錄)을 쓰게 된 것이다.
나는 공교롭게도 망국의 한(亡國之恨)이 지배하던 일본 통치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서 자라났으며 그 시대의 교육도 받았다. 그러던중 청장년시대에는 뜻밖에도 국토해방이라는 환희(歡喜)도 맛보았고 동시에 초래한 사회 혼란상에 적응하기에 안간힘을 다 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식민통치 35년은 일본천황의 무조건 항복선언으로 그 종말을 보았는데 한반도에는 미군과 쏘련군이 각각 진주하여 왔으니 국토는 38선을 경계로 하고 남북으로 분단 된 것이다. 아무도 생각조차 못하던 비극이 찾아 온 것이다. 한민족에게 또 한번 한(恨)이 찾아 온 것이다. 남북은 Ideology가 전연 상반하는 정체에 의하여 지배당하게 되니 6-25라는 동족상잔의 처절함과 38선이란 국토분단의 고초를 반세기가 넘도록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미군 진주후 미국유학이란 기회를 포착하였고 도미 유학한 다음에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하에서 보건후생부 직원으로 봉사를 한 것이다. 그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그 중에서 기억에 남아 있는 대략을 적어서 회고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바이다.
나는 일찌감치 해외로 가족동반으로 출국하였고 U. N.직원으로 봉사하다가 만 60세에 은퇴를 하였고 그후는 미국으로 이민하여 시민권을 획득하고 이 나라에서 영주하기로 결심 한 것이다. 소위 1세대에 해당한다.
소위 1.5세대 와 2.0세대 가 차츰 세대교체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들 후진 세대는 1세대와는 달리 이 나라의 주류사회로 진입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후세대를 위한 뿌리교육은 매우 중요하며 1세 들의 채무(債務) 라고도 할 것이다. 나의 회고록이 그들 후생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 간절하다.
후생이 가외(後生可畏)라고 하였다. 선도(善導)하여 무한한 발전으로 유도하여야 한다. 한국사람들의 단점(固疾)을 시정하기 위하여서는 '정직'(正直)할 것과 '남한테 폐(弊) 끼치지 말아라!' 라는 부탁을 남기고 싶다.
이 세상에 요행수라는 것들은 없다. 스스로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진다. 라고 부탁한다.
이 회고록을 후손들이 참작한다며는 고맙겠다.
Henry Song, 86세
May 13, 2000
John 의 電話; 7月8日/00, 8時半, 나의 回顧錄 Print 郵送한 것 어제날짜로 잘 받았고 현재 耽讀하고 있다고 한다. 맞춤법 고쳐서 다시 보내온다고 하기에 그럴 필요는 없으니 잘 보관하라고 일렀다. 永久保存하기 바란다.
7月8日2000年 父信
添言: 7月14日; 엊그제 世亮宅과 電話連絡한 內容: Floppy Disc에 copy된 이 回顧錄을 lap top PC로 熱讀하는 중인데, 맞춤법과 語彙에 異常을 發見하고 있다면서 自己가 다시 Editing하여 보겠다는 것이다. 可好하다고 하였다. 내일 土曜日에 만나면은 Computer에 關한 一闊討論을 할 터임으로 그때 이것저것 모두 마무리하도록 할까 한다. 特히 留意 할 点은 save된 file을 모두 整理하는 일 이다. Folder와 File의 聯關關係를 어찌 取扱하는지 꼭 배워야만 한다.